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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608호 2018년 10월 1일

문학이야기

[문학이야기 (28)] 안수길 《제3인간형》


생활고로 멀어진 작가의 삶

6·25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을 온 석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교편을 잡는다. 그는 원래 신문사에 근무하며 글을 쓰던 작가였으나 전쟁통의 문단 환경은 몹시 열악하다. 정치적 운동에 흥미가 없는 석은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정치 선전선동의 광풍에 몸을 던지기 싫었고 무엇보다 처자식을 위해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소소한 글을 팔지 않고 창작에 골몰할 수 있을 거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잡무가 끊이지 않았고 스물네 시간 온 신경을 아이들에게 써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훌륭한 교육자가 되면 어떨까? 그러나 교육자로서 석은 아직 애송이였다. 그리고 긴 세월 삶의 목표였던 작가의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생활에 우울감을 느낄 무렵 문단의 옛 벗 조운이 찾아온다.

이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삶의 여정을 걷는 세 인물을 조명하고 있다. 그중 외면적으로 화려한 삶의 전환을 꾀한 사람은 조운이다. 작가 조운은 독특한 철학적 명제를 난해한 문장에 담는 개성 뚜렷한 존재였다. 자의식 가득한 작품 세계를 고집하였고 생활을 위해 매문하지 않았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문학적 결벽성을 유지하는 그는 문단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문단과 발을 끊은 지 3년 만에 석을 찾아온 것이다. 무성한 소문대로 그는 사업가로 대성해 있었다. 피난 온 부산에서 운수업에 손을 대어 큰 부를 축적하였다. 돈 버는 재미는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무얼 생각하고, 값싼 담배를 하루에 오십여 대씩이나 연달아 피워 가며, 좁은 방에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면서 원고지 빈 칸을 메우는 그런 세상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진 조운은 몸이 나고 이맛살이 펴졌다. 이름마저 본명인 최춘택으로 돌아갔다. 춘택은 도연명의 시구 ‘춘수는 만사택(봄 물은 연못에 가득하다)’을 연상케 하며 인생을 즐기게 된 변화를 설명하는 이름이다.

그러던 조운은 어느 날 부산역 앞에서 우연히 미이를 만난다. 미이 역시 극적인 삶의 전환을 이룬 인물이다. 다만 조운과 달리 미이의 그것은 내면적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원래 미이는 조운이 작가 시절 그를 따랐던 문학소녀다. 부유한 가정에서 밝고 명랑하게 자란 미이는 조운의 눈에 부박한 소녀로 보였으나 수준 높은 습작을 보인 후 조운의 인정을 받게 된다. 늘 인생이 즐겁고 고마운 미이는 조운에게 선생님도 인생을 즐겁게 보세요. 좀 화려해지시구 이맛살 펴시구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백화점으로 조운을 끌고 가 화려한 넥타이를 선물하고 그가 늘 매고 다니던 검정 넥타이를 가져가 버린다. 인생의 상장(喪章) 같은 검정 넥타이 그만 매시라는 게 그녀의 메시지인 듯했다. 사실 조운의 변화에 미이의 영향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폭격을 피해 시골 처삼촌집 마루 밑에 숨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조운은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면 인생을 까다롭게, 이맛살을 찡그리고 살지 말자고 결심했었다. 넥타이를 사 줄 때는 무심히 들었던 미이의 말을 떠올리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다시 만난 미이는 조운의 편하게 풀어진 모습을 환영하기는커녕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미이는 말한다. 사람이 태어난 것은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이며 자신은 그 사명을 찾아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겠노라고. 전쟁은 그녀의 행복한 가정을 파괴하였다. 폭격으로 집은 재가 되고 오빠는 행방불명되고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어머니는 목판을 벌여 생활비를 번다. 그런 참혹함 속에서 미이는 이전과는 다른 생을 찾게 된 것이다.


홀연히 떠난 미이

조운은 미이에게 작은 가게를 차려주기로 했으나 약속한 날 미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간호장교가 되기 위해 떠난다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간호장교. 그것이 미이가 발견한 삶의 소명이었다. 선생님은 역시 검정 넥타이를 매셔야 격에 어울립니다. 안녕히. 조운은 미이의 쪽지를 보고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잘난 척하던 자신이 사변을 핑계로 포기한 길을 철부지 소녀라 생각한 미이가 걷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성장하고 굳세어진 미이. 그러나 정신이 타락했을 뿐인 자신. 조운은 아픈 각성 속에서 하나의 구원을 찾아 옛 벗 석을 찾아온다. 그러나 조운의 이야기를 들은 석의 관심은 조운이 아니라 미이에게 쏠린다. 그 역시 생을 개척하는 미이의 용감성에 감동받은 것이다. 그리고 또 석은 생각한다. 사변의 압력으로 사명을 포기한 것은 조운, 사변을 통하여 사명을 찾은 것은 미이. 그러면 자신은 무엇인가? 사명을 ‘포기하지도 충실하지도 못하고 말라 가는 나는?’

1952년 발표…김환기 화백이 표지 도안 ‘화제’

1952년 발표된 이 작품은 치열한 삶의 이정을 모색하는 지식인의 내적 고뇌를 다룬다는 면에서 지식인 소설의 면모를 가진다. 1954년 같은 표제로 발행된 단행본은 김환기 화백이 표지를 도안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의 모퉁이에서 슬그머니 사명을 내려놓은 조운, 삶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고 사명을 찾아 시대적 요구에 응하는 미이. 그리고 사명과 생활 사이 회색 지대에 고여 회의를 거듭하는 제3의 인간형 석. 이들의 성찰과 좌절, 변화와 방황은 이제 막 자신의 생을 시작하는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생각된다. 과연 내 삶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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