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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95호 2018년 5월 21일

문학이야기

[문학이야기(16)] 《정과정》


연시가 아니었다.

고교 시절 교과서에 실린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연시(戀詩)로 읽었다가 수업 시간에 연정의 대상이 연인이 아니라 임금임을 알고는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는 ‘각이 잔뜩 잡힌’ 용어까지 배우고 나니 낭만적인 한 편의 연시는 시험용 텍스트가 돼 버렸다.

그런 경험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인 고은은 ‘정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지난날 나는 이것을 읽고 무척이나 좋아했다. 사랑의 갈등으로 하여금 더욱 진한 사랑이 되는 옛사람들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섬기던 임금에 대한 호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얼마나 업신여겼던가. 이제 호오(好惡)를 지나 하나의 작품으로 본다.”

정서는 고려 중기의 문인인데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래로 귀양을 가게 됐다. 의종은 유배 가 있으면 곧 다시 부르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 그의 호가 과정(瓜亭)이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 노래를 ‘정과정’이라 이름 붙였다. 이 노래를 불렀던 곡조의 이름을 따서 삼진작(三眞勺)이라고도 한다. 고려가요 중 향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 마지막 행의 ‘아소 님하’를 통해 10구체 향가의 형식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가의 이름이 전해오는 작품이며 무엇보다 유배문학 효시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유배지에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절절하게 노래했다고 해 충신연주지사로 널리 알려졌고 궁중의 속악 악장으로 채택돼 기녀는 물론 사대부에게도 학습 대상이 됐다.


서정성이 물씬 풍기다

충신연주지사의 창작 동기에 다시 관직에 나가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후세의 시인에게 업신여김을 받았으리라. 그렇다면 오래 전 사미인곡 수업을 받은 여고생은 왜 실망했을까?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 연시이고 현세적 성취의 수단인 것이 충신연주지사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전자가 인간 근원의 아름다움이라면 후자는 홍진(紅塵)의 이전투구라는 어렴풋한 직관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꼭 그것이 다이겠는가? 정과정은 서정성 물씬한 시가다. 의종이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보아 정서는 실제 역모를 했다기보다 궁중의 알력 관계에서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몹시 억울했을 것이고 그 억울함을 잔월효성(殘月曉星), 즉 지는 달과 새벽 별에 호소했다. 달과 별은 천상의 존재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초월적 힘을 가진 존재이므로 자신의 죄 없음을 입증할 존재로 달과 별을 내세웠을 것이다.

정철과 계보가 이어지다

또 고독한 심경을 접동새에 투영해 구슬픈 새 울음소리를 시행에 배어들게 했다. 호소력이 풍부한 표현들이다. 그리고 군신(君臣)이라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수평적인 남녀관계로 전환시킨 뒤 여성 화자를 내세워 연모와 원망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출해 문학성을 성취했다. 그리하여 충신연주지사는 시가로서의 생명력을 얻고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형성됐다.

그러나 관리를 귀양 보내고 다시 부르는 것은 천상이 아니라 지상의 일. 정서가 정과정을 부른 것은 유배 간 지 5년에서 10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의종은 이 노랠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끝내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등용된 것은 의종이 정중부의 난으로 쫓겨난 뒤, 유배 간 지 무려 20년이 지난 뒤였다.

정서는 이 노래를 불러 얻고자 한 것을 얻지 못했고 얻고자 했는지 알 길 없는 문학사 속 불멸을 얻었다. 이런 작품 외적 아이러니가 이 연군의 노래에 원가(怨歌)의 성격과 비극적 색채를 더한다. 그래서 더욱 유배문학 효시답다 하겠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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