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불가리아의 88올림픽 영웅 역도선수 슐레이마놀루
"내 이름을 바꾸라면 터키로 망명하겠다"
■ 체크 포인트
식민지 등 정복된 국가에선 자주 이름바꾸기가 강제로 시행된다. 터키와 불가리아 사이에서도 창씨개명이 분쟁을 일으켰는데…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50) 창씨개명 이야기
일제 강점기에만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게일어 지명을 영어식으로 모두 바꾸었다. 세계적인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얼(Brian Friel: 1929~)은 《이름 바꾸기(Translations)》(1980)라는 3막 희곡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19세기 말 아일랜드 도네갈 지방의 한 농촌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이름과 지명과 언어 자체가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급격하게 바뀌는 현실을 증언한다. 고유한 언어가 소멸해 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아일랜드를 정복한 영국의 이름바꾸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례도 있다. 이름 바꾸기를 강요당해 국적을 버리고 망명한 스포츠 스타의 이야기다. 나임 슐레이마놀루(터키)의 처음 이름은 나임 슐레이마노프다. 불가리아 산간 마을에서 광부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55㎝의 단신이었지만 152㎝인 아버지와 141㎝인 어머니에 비하면 그는 가족 중 최장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던 슐레이마놀루는 15세 때 이미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자기 몸무게의 세 배를 들어 올린 역사상 두 번째의 인간이 되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1984년부터 ‘슐레이마노프’에게 매달 연금을 지급하고 아파트도 제공했다. 일종의 파격이자 엄청난 특혜였다. 문제는 같은 해 1984년에 터진 터키계 불가리아인들의 시위다. 불가리아 정부는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반터키 캠페인이 일어나고 모스크가 폐쇄되었으며 이슬람 축제 및 이슬람식 장례식 금지, 터키어 사용 금지, 터키 민족의상 착용 금지 등의 조치가 잇따랐다. 시위 참여자들은 체포되어 실형 선고를 받았다. 나임 슐레이마놀루는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12월 이 모든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불가리아와 터키의 외교분쟁

1985년 호주 멜버른의 전지훈련, 슐레이마놀루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불가리아에서 터키로 국적을 바꾼 남성이었다. 그는 슐레이마놀루의 망명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18세의 세계기록보유자 소년은 마음이 흔들렸지만, 일단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답했다. ‘불가리아 정부가 내 터키식 이름을 불가리아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한다면, 그때는 망명을 고려해보겠습니다’라고.

귀국 후 불가리아 정부는 나임 슐레이마놀루의 여권을 회수했다. 그리고 불가리아식 이름인 ‘나음 슐레이마노프’ 명의의 새 여권을 발급했다. 얼마 후 슐레이마놀루는 그가 ‘진정한 불가리아식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는다. 애초에 인터뷰 자체를 한 사실이 없었지만, 터키계 불가리아 사람들은 소년에게 ‘영혼을 팔았다’며 야유하고 비난했다. 1986년 12월,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회식 도중 자리를 뜬 뒤 돌아오지 않았다. 4일간의 ‘실종’ 후 소년은 멜버른 주재 터키 영사를 찾아가 망명을 요청했다. 비행기 편으로 런던으로 날아간 슐레이마놀루 앞에 터키 총리가 보낸 그만을 위한 전용기 한 대가 모습을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터키 땅에 엎드려 키스하는 모습은 터키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는 곧바로 나라를 대표하는 영웅이 되었다.

문제는 올림픽 규정이었다. 국적을 바꾼 선수는 원 국적 국가가 동의서를 써주지 않는 한 3년 이내에는 대회 출전이 불가능하다. 1988년 초, 터키 정부는 불가리아 정부에 100만달러를 건넸다. 명목은 지금까지 슐레이마놀루에게 들어간 ‘훈련비, 연금, 아파트 제공비의 정산’이었다. 불가리아는 그가 ‘공개 석상에서 불가리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의서를 발급했다.

“내 이름을 바꿀 수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 경기장. 슐레이마놀루는 인상, 용상, 합계 세계신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시상대의 맨 위에 선다. 공교롭게도,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불가리아의 스테판 토프로프다. 터키 정부는 이번에도 서울까지 전용기를 보내 영웅의 귀환을 축하했다. 100만명의 환영 인파 앞에서, TV로 생중계되는 화면 앞에서 슐레이마놀루는 ‘이 메달은 나의 메달이 아니다. 터키 국민의 메달이다!’라고 포효했다. 불가리아 정부와 터키 정부 사이의 약속은 지켜졌지만, 세계 여론이 움직였다.

불가리아 내 소수민족 박해 문제가 슐레이마놀루로 인해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90만명에 달했던 불가리아 내 터키인들의 30%가 터키로 ‘이민’ 가기를 원했고, 불가리아 정부는 이들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