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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숫자로 읽는 세상

    삼성의 도전과 헌신 되새긴 'KH 유산'

    “당신의 도전으로 용기를 얻었습니다. 회장님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습니다.”25일 삼성 사내 인트라넷에 꾸려진 ‘이건희 회장 2주기 온라인 추모관’의 대표 글이다. 이 회장이 별세한 지 2년이 됐다. ‘인간 중시’와 ‘기술 중시’를 앞세워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든 이 회장의 리더십을 기리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그가 남긴 미술품 등 이른바 ‘KH(이건희) 유산’도 주목받고 있다. 삼성, 31년간 39배 성장이날 경기 수원시 이목동 삼성가 선영에선 이 회장의 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홍라희 전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삼성글로벌리서치 고문, 김재열 국제빙상경기연맹 회장 등 유족이 참석했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 등 전·현직 삼성 경영진 300여 명도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재계에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세 아들과 함께 추모식장을 찾았다.이 부회장은 사장단과 오찬을 함께하며 이 회장의 업적을 되돌아본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장 재임 31년간 삼성 매출은 10조원에서 387조원으로 약 39배로 불어났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359배 늘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스마트폰, TV, 모니터, D램, 낸드플래시 등 수많은 세계 1등 품목을 만들어냈다.산업계에선 이 회장이 1993년 “마누라와 자식을 빼곤 다 바꾸자”고 외친 ‘삼성 신경영’ 선언을 성장의 변곡점으로 꼽는다. 그는 ‘인재 제

  • 커버스토리

    이건희 타계 1주기…기업가 정신을 되새기다

    생글생글은 3주 전 아이폰을 만든 ‘미국의 영웅’ 스티브 잡스를 기리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가 아이폰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애플을 어떤 기업으로 성장시켰는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획이었습니다.생글은 이번주에 타계 1주기(10월 25일)를 맞은 ‘한국의 영웅’ 이건희 삼성 회장을 되돌아보는 커버스토리를 준비했습니다. 자원과 기술이 척박했던 한국에서 이 회장이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 사업을 할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삼성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되짚어 보려는 것이죠.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87년 삼성 지휘봉을 잡은 이 회장은 30년 만에 삼성을 반도체와 휴대폰 부문에서 ‘월클 레전드’ 기업으로 올려 놨습니다. 이 회장이 이룬 업적은 잡스의 업적보다 결코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는 돈도, 자원도, 인재도, 시장도 넘치지만 한국 사정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꽉 잡고 있던 반도체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세계적 기업들이 쥐락펴락하는 휴대폰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이 회장은 다 바꿀 것을 삼성 식구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봐”는 그가 남긴 대표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삼성에 초일류 DNA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장이 월급쟁이 경영자였다면 이런 변신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미래라는 불확실성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혁신한 기업가였습니다. 설탕, 밀가루, 라디오, TV 생산에 만족하면서 회사를 꾸렸다면 지금 같은 삼성은 없었겠지요. 이것을 우리는 기업가 정신이라

  • 커버스토리

    '세계 1등' DNA 심어준 도전가…삼성을 '월클'로 키우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한국 기업 역사에서 ‘월클 레전드’로 평가받습니다. 축구 같은 스포츠에서 한 선수가 ‘세계 최고 반열’에 오르려면 어떤 실력을 갖춰야 하는지를 여러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데이비드 베컴, 디에고 마라도나,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 우리는 레전드들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업적을 추앙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왜 ‘월클’로 꼽힐까요?이 회장은 1987년 부친인 고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삼성을 맡았습니다. 그가 30년간 이룬 업적을 몇몇 수치를 통해 살펴볼까요? (1)매출: 1987년 9조9000억원, 2018년 387조원. (2)영업이익: 1987년 2000억원, 2018년 72조원. (3)시가총액: 1987년 1조원, 2018년 396조원. (4)고용 인력: 1987년 10만 명, 2018년 52만 명. 더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매출 39배, 영업이익 360배, 시가총액 396배, 인력 5.2배 증가. 삼성이라는 브랜드 파워는 1987년 바닥권에서 작년 5위로 올라섰습니다. 작년 발표된 ‘글로벌 100대 브랜드’ 순위에서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다음 자리를 삼성이 꿰찬 겁니다. 정확하게 한 세대(30년)를 고생한 끝에 낙(樂)이 온 겁니다. 경이적인 성과요 성장입니다. 애플도 경계하는 초일류가 됐습니다.아무나 할 수 있다고요? 그렇다면 한국에 삼성 같은 초일류 기업이 10개, 20개는 됐겠죠? 기업 세계, 시장의 세계는 아무나 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잠시 자연의 세계를 들여다봅시다. 지구 역사상 대멸종사건이 다섯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생물 99%가 멸종했고 1%만 생존해 지금 지구에 남았다고 합니다. 환경에 적응하고, 변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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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혁신으로 한계 뛰어넘자"…초일류 경영 '뚝심'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합니다.”이건희 삼성 회장이 201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눕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그해 신년사입니다. 지난해 별세할 때까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혁신으로 한계를 돌파하자는 이 회장의 2014년 신년사는 그의 마지막 어록이 되었습니다. 이미 삼성전자를 세계 1등 기업으로 키운 그이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끝없는 혁신을 강조한 것입니다. “삼성은 국민적 기업, 초일류로 성장시킬 것”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1987년 별세하면서 45세의 나이에 삼성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의 취임 일성은 ‘제2의 창업’이었습니다. 창업주의 유지를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켜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삼성은 이미 한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을 넘어 국민적 기업”이라는 회장 취임사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1983년부터 투자한 D램 반도체를 1993년 세계 1위로 키운 이 회장은 그해 6월 독일 출장 중에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아 칼로 깎아내는 사내방송 비디오를 본 뒤 곧바로 서울로 전화를 걸어 “사장들과 임원들을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삼성그룹의 운명을 바꾼 전화 한 통,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350여 시간 이어진 강연을 통해 이 회장은 ‘신(新)경영’을 강조했습니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잘해봐야 1.5류”라고 질타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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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계 초일류 자신감 심다…이건희 (1942~2020)

    “미국에 애플이 있다면 한국엔 삼성이 있다.”정보통신기술(ICT)업계에서 애플은 ‘혁신의 아이콘’이다. 애플이 개발한 윈도우형 OS(컴퓨터 운영체제)와 스마트폰 아이폰은 세계적 표준이 됐다. 하지만 한국 기업 삼성은 도전과 혁신으로 수많은 1등 제품을 만들어내며 세계 ICT업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스마트폰은 삼성전자가 지난 8월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22%로 애플(12%)과 격차를 벌리며 세계 1위를 고수했다. 반도체, OLED 등 디스플레이, 리튬이온전지 등 배터리 등도 삼성이 만든 세계 1위 제품이다. 삼성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를 도모하는 기업으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고 한국인의 자존심을 높여주고 있다.이런 초일류 기업을 일군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그의 타계 소식에 세계는 경영계의 큰 별이 졌다며 애도했다.이 회장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1987년 삼성 회장직에 올랐다. 섬유·화학·무역·금융이 주력이고 전자제품은 TV 정도 제조하던 삼성을 ICT 위주로 재편하면서 1987년 10조원을 밑돌던 그룹의 매출 규모를 2018년 387조원으로 키웠다. 창업주를 보좌하던 그가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시작한 반도체사업은 오늘날 삼성이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6분의 1 비중을 담당하도록 하는 초석이 됐다.그는 1993년 ‘신경영’을 내세우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말로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주도했다. 1명의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인재경영’과 디자인을 중시하는 디자인경영도 이끌었다. 언제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새로운 사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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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매출 10조→387조…애플도 떨게 한 '경영 거인'

    지구 역사에 다섯 번의 대멸종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사이 지구상에 살던 생물의 99%가 멸종하고 1%만 생존했다고 한다.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고 변이한 종은 살아남았다. 적응, 변이, 생존. 이것은 생태계에만 적용되는 메커니즘이 아니다. 기업도 그렇다. 한 기업이 생겨나고, 적응하고, 변이하는 과정도 거의 마찬가지다. 환경 변화에 늦고, 적응하지 못하고, 변이하지 않으면 기업 생태계에서 사라졌다. 한 개 기업엔 잔인할지 모르지만, 기업 생태계 전체 관점에선 건강한 과정이다. 삼성은 ‘자연선택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다.고(故) 이건희 회장이 취임했던 1987년 삼성은 오늘의 삼성과 너무도 달랐다. 지구적 기업 생태계에서 삼성은 하찮은 존재였다. 먹이사슬의 밑바닥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20일 발표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삼성의 순위는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수직상승했음을 보여준다. 5위다. 삼성보다 앞서 있는 브랜드는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뿐이다. 삼성그룹의 30년 성장 역사를 보여주는 수치를 좀 더 나열해보자. (1)매출: 1987년 9조9000억원, 2018년 387조원 (2)영업이익: 1987년 2000억원, 2018년 72조원 (3)주식시장 시가총액: 1987년 1조원, 2018년 396조원 (4)인력: 1987년 10만 명, 2018년 52만 명. 매출은 39배, 영업이익은 360배, 시가총액은 396배, 인력은 5.2배로 늘었다. 30년, 한 세대 만에 이룬 경이적 성장이며 애플도 경계하는 성장이다.기업 생태계는 자연보다 더 혹독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졸면 죽는 곳이 기업 생태계다. 방심하면 바로 누군가가 추격해 들어와선 시장을 빼앗아 가고 만다.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에 넘어가고,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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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재 확보·전화기 화형식…삼성 퀀텀점프 이끌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일생은 도전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말렸던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 세계 1위로 키워냈고, 일본에 뒤처졌던 TV와 스마트폰에서는 추종을 불허할 만큼 격차를 벌렸다. 이 회장은 중요한 순간마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결단하고, 고비 때마다 특유의 경영철학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변화와 혁신이 회장의 혁신 방식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의식부터 바꾸자”는 데서 출발한다. 사업이나 구조로 혁신을 시작한 게 아니라 의식의 근원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삼성은 1993년 8월 전격적으로 ‘7·4제’를 시행했다. 오전 7시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하는 이 제도가 시행되자 임직원들은 이 회장의 개혁 철학을 체감하게 됐다.‘품질경영’은 이 회장의 또 다른 화두였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직후 이 회장은 “질(質)로 가서 점유율이 떨어지고 적자가 나도 좋다. 적자가 나면 내 사재라도 털겠다”며 열변을 토했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사업부는 제품 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그는 수거된 15만 대의 전화기를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불태우는 화형식으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다.복합화, 정보화, 국제화도 줄기차게 역설했다. 이 회장은 “100층이든 80층이든 빌딩에 기획, 디자인, 설계, 판매 등 각 조직 담당자가 모두 입주해 있다면 필요할 때 40초면 회의실에 모일 수 있다”며 빌딩 복합화의 예를 들었다. 삼성이 수원, 화성, 아산 등에 공장과 연구시설, 병원, 학교 등을 갖춘 대단위 복합단지를 구축한 것은 제품 개발부터 양산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스피드 경영’으로 나타났다.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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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폰' 회로기판에 새겨진 '할 수 있다는 믿음'

    ‘할 수 있다는 믿음’.1998년 10월 출시된 삼성전자의 최초 폴더형 휴대폰 ‘SCH-800’ 회로기판에 새겨진 문구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시절, 위기를 극복하고 초일류로 성장하겠다는 삼성전자 직원들의 꿈이 담겼다. 1990년대 초 이건희 삼성 회장은 “향후 한 명당 한 대의 무선 단말기를 갖는 시대가 온다”며 무선전화기 개발주기를 앞당기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 회장은 직접 휴대폰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등 휴대폰에 공을 들였다. 1994년 이 회장의 아이디어가 담긴 애니콜 브랜드 휴대폰 ‘SH-770’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통화와 종료버튼을 키패드 맨 위에 놓도록 고안해 모든 업체가 따라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양산에 치중하느라 불량률이 11.8%에 이르자 1995년 3월 수거된 휴대폰 5만여 대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 4위였던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이듬해 모토로라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애니콜 신화의 시작이었다.이후 ‘이건희 폰’으로 불리며 2002년 출시된 ‘SGH-T100’과 ‘SCH-X430’은 당시로선 최고 스펙인 31만 화소의 내장 카메라와 동영상 촬영기능, ‘클램셸’(조개) 디자인 등으로 호평을 받아 불과 2년 만에 세계 1000만 대 이상 판매되는 성공을 거뒀다.2010년 등장한 ‘갤럭시S’ 역시 ‘이건희 폰’이라는 수식어를 얻을 정도로 이건희 회장의 꿈과 열정이 담겼다. 터치로 화면 입력을 인식하면서 LCD보다 훨씬 밝고 화사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화면을 최초로 채택하는 등 애플의 아이폰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갤럭시S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세계 시장 1위를 굳건히 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