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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에 합류한 고려…900여척 전함에 1만여명 태우고 마산서 출항

    4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이 부여한 최대 과제는 남송의 멸망과 동방의 완전한 정복이었다. 일본열도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었다. 일부의 견해대로 남송을 공격할 때 외교적인 배후 역할 정도였다. 쿠빌라이칸은 1226년 고려에 일본 정벌 의도를 선언하고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68년 6월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신을 억류했다.드디어 원정이 결정되고, 고려는 정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그믐까지 대선과 소선(小船)을 합쳐 900척을 건조했고, 물품도 모두 갖췄다. 변산반도 지역과 나주 천관산 지역의 목재를 활용해 전선 300척, 빠른 공격선 300척, 급수선 300척 등 900척을 불과 4개월 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의 조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고, 계속된 전쟁에도 국력과 노동력 등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음력 10월 3일. 원나라의 홀돈(忽敦·쿠둔)과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한군(蒙·漢軍) 2만5000명과 군사 8000명, 사공(梢工)·수로안내자(引海)·선원(水手) 6700명을 포함한 1만4700명의 고려군이 승선한 전함 900여 척이 마산 합포에서 출항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음력 10월 5일 대마도 남쪽에 상륙해서 고모다 해안(小茂田浜)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연합군은 이어 음력 10월 14일 늦은 오후 50여㎞ 떨어진 이끼섬에 상륙하고, 15일에 점령했다.해안에서 평지로 20여㎞ 진군하면 일본의 서경이며 군사사령부인 다자이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은 돌연 퇴각해서 만 안에 정박시킨 선박으로 귀환했다. 이후 새벽녘에 폭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새 농토·풍성한 수확물 찾아 대항해 나선 한반도 남부인…1000년 동안 철기와 볍씨 쪽배에 실어 남해 건넜다

    야요이시대 사람의 생물학적 유사성일본 야요이문화를 발전시킨 이주민들의 정체는 생물학적인 성격을 분석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유골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길며, 코가 높다. 하니하라 가즈로 일본 도쿄대 교수는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인구 모델을 적용했더니 기원전 300년 경부터 기원후 700년까지 원주민의 비율과 도래인(진출자)의 비율은 1 대 9.6이었다. 또 두개골의 형태를 비교했더니 원주민과 이주계의 혼혈 비율이 서부 일본은 1 대 9 내지 2 대 8에 가깝고, 간토(關東) 지방은 3 대 7이었다. 1000년 동안 사람들이 대규모로 험한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것이다. 또 신라계 주민들이 주로 개척한 돗토리현의 야요이인들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조사한 결과는 놀랍게도 혼슈지역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했다.이런 역사를 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론’ ‘일선동조론’ ‘동조동근론’,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천황의 신민인 우리는 창씨개명해야 한다며 동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그들은 주(主)와 부(副)를 속였다. 우리가 주이고, 일본인의 원형이었다.조한(朝漢)전쟁과 한민족의 이주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재미가 있고, 의미도 크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있다. 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을까? 그 동기를 알고, 신천지를 개척한 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배우는 일이다.우선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 세계는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중국 대륙은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계속했다. 북방의 흉노가 침공하면서 숱한 유민이 생겨 동쪽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원조선(고조선)에서는 이주민인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랴오둥반도·일본열도에서 발굴한 석기시대 유물 한반도에서도 발견…벼농사도 해양활동으로 전파

    신석기 때부터 해양교류 활발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고산리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초기 신석기인들이 만든 문화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 육지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수면이 150m 이상 상승했다. 대한해협과 대마도 같은 섬들이 이때 생겨났다. 7000년 전쯤에는 인간들이 이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오갔다. 부산의 동삼동과 조도의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일본열도계의 토기와 전략물자인 흑요석 제품들이 발견됐다. 반대로 대마도와 규슈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계통의 토기와 돌제품들이 발견됐다.2004년엔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3m, 폭 60㎝ 정도의 쪽배유물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약 8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런 쪽배나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닌 것이다. 동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지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가 발견됐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에는 신석기 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 초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여기엔 수십 마리의 고래 등 어류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초기 패총에선 상어뼈와 고래뼈가 발견됐다. 선사시대에 동해 전체와 심지어는 남해에서도 포경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들이다.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에는 좁은 발해만이 있다. 에게해와 넓이가 비슷한 소지중해다. 징검다리 같은 묘도군도 등 몇몇 섬에선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그 일대에 5000년 전에 해운업이 있었다는 주장들을 한다.해로로 전래된 벼농사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다는 더 많이 활용됐다. 고인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