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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초대형 다이아몬드 원석 발견으로 보어전쟁 촉발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부어(boer)’(독일어로 농부를 가리키는 ‘바우어(bauer)’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에서 나온 보어(boer)인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1650년대 동인도회사 소속 식민지 주민으로 시작했다. 한때 케이프타운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봄베이, 벵갈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인도회사의 영화를 상징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지역 네덜란드인들은 179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몇 년 만에 영국에 점령당한 뒤 영국의 신민으로 살아갔다. 이후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일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영국과의 마찰을 피해 남아프리카 내륙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트란스발 지역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이라는 네덜란드계 국가를 건설했다.조용한 ‘농업 독립국’으로 남을 법했던 이들 지역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1866년 오렌지강 연안에서 21캐럿짜리 초대형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농사짓고 있는 발밑에 초대형 다이아몬드 광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 프리토리아 지역에선 무려 ‘3025캐럿’이라는 역사상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어 남아공에도 거대한 금광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아공 지역은 맹목적인 충동과 탐욕이 집결하는 땅이 됐다.이 같은 ‘노다지 판’을 영국이 가만 놔둘 턱이 없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에도 세계 식민지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남아프리카의 위상이 높았던 데다 당장 얻을 ‘돈’도 적지 않았기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차 세계대전으로 금본위제 흔들리며 국제금융 마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했고 미국도 1900년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1900년이 되면서 유럽과 북미,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금에 기반을 둔 화폐체제를 구축했다. 고전적 금본위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때에는 지폐를 통화당국에 들고 가면 언제라도 법이 정한 무게의 순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1914년 이전 영국에선 파운드당 순금 113.0016그레인으로 교환됐고, 미국에선 달러당 순금 23.22그레인의 비율로 태환됐다. 금태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영국은 1844년 ‘은행허가법’에서 영국중앙은행의 은행권 발행액이 금 보유액에 14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독일도 1876년 관련법을 통해 독일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량은 제국은행 금 보유액 및 재무성 증권 보유액의 세 배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금에 기반을 둔 안정된 통화체제가 갖춰지면서 세계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인플레이션 위협이 약해졌다. 금본위제 아래 통화정책은 금의 화폐가치를 유지한다는 준칙에 따라 이뤄졌고, 이 준칙이 잘 지켜지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이후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경제학자 윌리엄 샤를링의 분석에 따르면 1873~1886년 사이 유럽 주요 은행의 귀금속 보유량이 33억29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60억44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하는 동안 이 귀금속을 본위로 발행된 지폐 액수는 113억328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103억89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오히려 감소했다.이처럼 19세기 후반 금과 은 모두 생산이 늘었지만 두 금속의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금본위제로의 이행 배경에는 영국의 힘이 있었다. 바로 금의 가치가 지고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파운드·마르크·달러 화폐단위는 귀금속에서 유래

    드라크마. 유로화의 등장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천 년간 통용된 그리스의 화폐 단위 ‘드라크마’는 원래 ‘한 손 가득히’란 뜻으로 쇠꼬챙이 여섯 가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선 오랫동안 은이 주요 가치 척도 및 교환 수단으로 기능했다. 아나톨리아 고원 주요 광산에서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은이 산출됐고, 국제 교역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은은 주조된 단위에 따라 계산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중량을 달아 계산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에선 주화가 아닌 은괴의 무게를 달아 사용했고, 상황마다 금속의 가치는 천칭에 달아 결정했다.이에 따라 정의를 집행하는 법규에도 은의 무게를 통한 지불 방식이 명문화됐다. 기원전 2세기 메소포타미아 에슈눈나 법전에 “다른 사람의 코를 물었을 때 은 1미나(고대 그리스 무게 단위, 약 500그램)의 벌금이, 뺨을 때렸을 때는 10세켈(유대 무게 단위, 약 5온스)의 벌금이 부과됐다”는 식이다.반면 앤서니 앤드루스 옥스퍼드대 교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경 표준화된 철물을 교환 목적으로 사용했고, 철물의 대표주자는 바로 쇠꼬챙이였다. 이 같은 철물을 사용한 명칭은 화폐 명칭으로 이어졌다. ‘오볼로스’라는 작은 은화를 가리키는 단위는 한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유래했고 ‘드라크마’는 여섯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나왔다.이후 등장한 주요 화폐 단위도 대부분 귀금속의 무게를 재는 단위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영국의 ‘파운드’와 발음과 철자가 똑같은 무게 단위 ‘파운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파운드는 원래 은 1파운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중국 상인은 관료제에 종속된 부속계층에 불과…세계 최대 경제력도 중세 이후 정체 늪에 빠져

    전통시대 중국은 관료의 나라였다.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다. 존 킹 페어뱅크에 따르면 청나라 말 중국은 관료제의 천국이었고, 에티엔 발라스는 중국을 ‘영원한 관료제 사회’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 같은 관료제의 최상부에 진입하기 위해 중국의 지식인들은 ‘시험지옥’(미야자키 이치사다)이라 불리는 과거에 통과하기 위해 쓸모없는 ‘시험용’ 팔고문에 몰두했다.반면 거대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 최대 경제력을 유지하던 중국의 상업은 중세 이후 정체에 빠졌다. 청나라 말이 되면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리고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은 원흉으로 흔히 관료제가 거론된다.청말 상인들의 힘과 능력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관료들의 독단적인 행동에 종속돼 있었다. 관료들은 홍수나 가뭄 같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헌금을 요구했고, 면허장이나 독점권을 빌미로 부자들에게서 선물받기를 원했다. 상인들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업 분야보다는 토지나 부동산에 투자해 지주신사층(地主紳士層)에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관료들마저 관직을 통해 조성한 합법적·비합법적 재산을 토지에 재투자하는 상황에서 힘없는 상인들이 취할 다른 길은 없었다. 중국에서도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관리에 대한 상인의 종속은 다소 느슨해졌지만 그들은 결코 관료의 감독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관료들에게 상인은 언제나 개인적 이익 혹은 국가적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하거나 쥐어짜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상업 활동은 언제나 관료의 감독과 징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과 철, 차, 비단, 담배, 소금, 성냥 등은 국가가 전매제도로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별과 태양 보고 시간을 짐작하며 생활하던 사람들…19세기 후반 시간개념 생기며 '시간=돈' 세상 열려

    19세기 중반까지 마을마다 독자적인 시간 개념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별과 태양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매일 같은 시간에 산보를 나섰다는 칸트의 유명한 에피소드도 진위가 좀 의심스럽긴 하다.) 19세기 이전에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기에 시계에 분침이 없었지만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초 단위까지 정확히 맞출 것을 요구할 정도로 사회가 급변했다. 경영자와 관리인, 노동자는 점점 더 시계와 호각으로 규율되는 노동 일과에 묶여버렸다. 시간 엄수가 장려됐고, 늦으면 벌금이나 해고로 벌을 받아야 했다. 시간은 절약해야 하는 대상이 됐고, ‘시간이 돈’인 세상이 됐다.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으로, 편집증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 포그 씨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영국에 철도 생기며 시간망 통일이런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철도의 등장이었다. 1830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최초의 여객철도가 들어섰고, 이후 철도산업은 이윤이 쏠쏠하게 남는 산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1836~1837년 영국에서만 총 44개 회사가 총연장 2410㎞의 사업을 승인받는 ‘철도 붐’이 일었다. 1845~1847년에는 626개 회사가 승인받은 철도 건설 총연장이 1만5340㎞에 달했다. 일부 시행되지 않은 사업도 있었지만 1852년까지 영국에 건설된 철도의 총연장은 1만2000㎞로 오늘날 영국 철도 총연장의 3분의 1에 해당한다.철도 사업 투자자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인터넷처럼 철도를 획기적인 것으로 바라봤고 수익 창출 전망이 무한하다고 해석했다. 다른 철도회사들이 똑같은 목적지에 나란히 철도를 건설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이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초창기 사치품이었던 시계가 인류의 삶 바꿔놔…19세기엔 영국이 영토와 표준시까지 지배하게 돼

    시계는 근대의 산물로, 등장 초기엔 대표적인 사치품으로 꼽혔다. 1797년 영국에선 모든 시계에 세금이 부과됐다. 사치품인 시계는 철저히 징세 대상이었다. 당시 영국의 세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조세 감정인의 신고서는 영국인 사이에 시계가 얼마나 보급돼 있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피블스라는 조그만 마을의 조세신고서에는 ‘읍내에는 시계(괘종시계 탁상시계)가 15개, 은제 회중시계가 5개 있으며 금제 회중시계는 없다. 피블스 읍내와 시골, 교구를 통틀어 시계는 105개, 은제 회중시계는 112개, 금제 회중시계는 35개 있다’는 식으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겨두었다. 세금 부과를 위한 것이다. 시청사 시계 건립을 위한 세금 걷기도14~15세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기계식 시계가 매우 비싸 공공 부문에서 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356년 볼로냐의 시청사에 공공시계를 건립하기 위해 20세 이상 모든 시민에게 18페니의 세금이 부과됐다. 1386년 프랑스 국왕은 리옹 시의회가 공공시계 건립을 위해 부담금을 징수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당시 일부 리옹 시민은 세금 부담 탓에 시계 건립 계획에 격렬히 반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시계가 인간의 삶에 본격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세기다. 그리고 그 본고장은 영국이었다. 19세기 후반 세계 전역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의 영토뿐 아니라 각종 주요 표준까지 지배했다.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영국이 세계 측량 단위의 기점 역할도 병행했다. 1884년 국제위원회는 런던 근교 그리니치를 지나는 선을 세계 경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수백년 된 법조항까지 찾아내 기계사용 금지 주장했지만…기계 도입이란 시대적 흐름은 못막아 노동자 더 궁핍해져

    18세기 말 직물의 마무리 작업은 고도로 전문화된 공정이었다. 일부 대형 제조업체는 전 공정을 하나의 ‘공장’(오늘날의 공장과 비교하면 매우 소박했다)에서 수행했다. 고트라는 이름의 기업인은 한 지붕 밑에 80명의 전모공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인은 소규모 직물업자로부터 미완 상태의 옷감을 구입해 작업장으로 보낸 뒤 마무리 작업을 하도록 했다. 리즈의 작업장은 40~50명 또는 60명의 기술자와 수련공을 고용하고 있었다. 웨스트라이딩의 촌락에 있는 더 작은 마무리 작업장에선 겨우 5~6명을 고용했다. 1806년 통계 수치를 보면 웨스트라이딩의 직물 마무리업 마스터는 500명, 전모공은 수련공을 포함해 3000~5000명 수준을 오갔다.이런 전모공들은 마무리 공정을 통제했고, 조직을 갖추고 비숙련공을 배제했다. 그들은 웨스트라이딩 직물노동자 중 귀족층을 이뤘고, 정식으로 고용되기만 하면 19세기 초반 몇 년간은 주당 30실링이라는 고소득도 가능했다. 전모공은 ‘독립적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에 높은 정치의식으로 유명했다. “맥줏집에서 직조공이나 마무리공, 염색공보다 두세 배의 돈을 썼다”고도 전해진다. 당대 리즈 머큐리지는 “전모공은 엄밀히 말해 피고용인이 아니다”고 평했다.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룻밤 사이 자신을 노동 엘리트에서 ‘제조업에서 불필요한 신분층’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기계의 위험성도 잘 알았다. 좌파적 시각에서 보면 자본과 노동 간 경쟁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비용 절감 노력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와 이윤율 저하 경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계화는 이 같은 과정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9세기 초 수공업 기술자들의 기계파괴운동…영국, 1만2000명 군대병력 투입해 강력 대응

    1811년 영국에선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불린 폭력적인 소요가 발생했다. 랭커셔에선 역직기가 파괴됐다. 요크셔에선 전단기가 부서졌다. 미들랜즈에선 편직기가 박살났다.1811~1817년 발생했던 일련의 기계파괴운동은 영국 내 세 지역, 세 가지 직종에 한정된 운동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811년 11월 노팅엄셔에서 시작돼 이듬해 요크셔의 웨스트라이딩 지역으로 번졌다. 1813년 3월엔 랭커셔까지 기계파괴운동에 동참했다. 영국 정부는 러다이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기간 웰링턴 장군이 이베리아반도에 파견했던 것보다 더 많은 1만2000명의 군대 병력을 투입했다. 또 강력한 법적 처벌로 재발의 싹을 잘랐다.1810년대 러다이트 운동 첫 신호탄은 편직기 편물공들이 쐈지만 사실 기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오랜 역사가 있었다. 출처가 명확하진 않지만 ‘러다이트’라는 명칭도 1799년 두 대의 양말 짜는 기계를 부쉈던 네드 러드라는 노동자의 이름을 훗날 전모공들이 차용한 데서 비롯됐다. 그보다 앞선 1785년 에버레트가 영국 최초의 전모기를 만들자 실업자들은 그 기계를 불태웠고, 5만 명의 노동자가 아크라이트의 방적기계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유럽 대륙에서도 기계파괴운동의 전사라 불릴 만한 일이 적지 않았다. 1630년대 독일 단치히에서는 직물 짜는 기계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계 발명가를 몰래 교살하거나 물에 던져 죽여도 시장이 이를 묵인한다는 말이 돌았다. 기계의 발명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조치였다. 네덜란드 레이덴에서도 레이스 직공들의 폭동으로 시의회가 1629년까지 직물 짜는 기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