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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의 정책참여가 경제를 정치로 변질시킨다"

    19세기 들어 세계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문을 걸어잠그던 ‘중상주의’에서 애덤 스미스가 제안한 ‘자유방임의 지배’로 전환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1873년 시작된 세계 최초의 ‘대불황’이 23년간 지속되자 보호주의로 회귀했고, 이는 제국주의로 이어졌다. 이후 대공황(1929년)과 세계전쟁이 덮치자 세계는 개입주의로 치달았다.퇴조하던 자유주의를 부활시킨 주역은 자본주의 종가 영국, 미국이 아니라 독일(서독)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은 1948년 화폐개혁 후 ‘질서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대처와 레이건 시대인 1980년대 초에야 ‘신자유주의’로 회귀한 영국과 미국보다 30여 년이나 빠른 행보였다. ‘라인강의 기적’ 이끈 질서자유주의독일 질서자유주의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경제학자가 발터 오이켄(1891~1950)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정부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스경제학이 득세하던 시기에 독일은 오이켄 등이 주창한 프라이부르크학파의 질서자유주의를 채택했다. 결과는 ‘라인강의 기적’이었다. 오이켄 사후 2년 뒤 발간된 《경제정책의 원리》는 그의 통찰이 집대성된 경제학의 고전이다.오이켄은 독일 경제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린다. 질서자유주의의 핵심 명제는 “경제정책은 안정된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시장 과정에 자의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이켄 등장 전 독일과 유럽에선 ‘강단 사회주의자’ 구스타프 슈몰러(1838~1917)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경제학’이 대세였다. 역사학파는 ‘모든 사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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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의 성패는 지식근로자에 달려"…제조업 쇠퇴도 예언

    “다음 사회에서는 지식근로자가 지배적 집단이 될 것이다. 기업의 성공과 생존은 그 회사가 보유한 지식근로자의 성과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1909~2005)에게 ‘지식근로자(knowledge worker)’는 일생의 화두였다. 그는 1959년 《내일의 이정표》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뒤 평생에 걸쳐 저술과 강연을 통해 ‘지식사회’의 도래와 ‘지식근로자’의 등장을 설파했다.2002년 출간된 《넥스트 소사이어티(Managing in the Next Society)》 역시 지식사회 이론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지식근로자의 시대’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사회를 이끌 변화의 동력을 다각적으로 탐색했다.드러커가 예측한 다음 사회의 특성은 지식근로자의 급부상과 제조업의 쇠퇴, 인구 구조 변화로 요약된다. 그는 다가올 사회의 진정한 자본은 돈이 아니라 지식이며, 지식근로자가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될 것으로 봤다. 또 지식근로자를 자본가로 규정했다. 핵심 자원이자 생산수단인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지식근로자들이 연금기금과 투자신탁기금 투자를 통해 기업의 주주가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진정한 자본은 돈이 아니라 지식”드러커는 “지식사회는 상승 이동이 실질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열려 있는 최초의 인간사회”라고 단언했다. 국경이 없고, 누구나 쉽게 지식을 획득할 수 있지만,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질 것이란 설명이다. 지식사회를 가속화할 원동력은 정보기술이다. 드러커는 전통적인 지식근로자 외에 컴퓨터 기술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 ‘지식기술자(knowledge techn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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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역할은 자유 확장"…진리 포기한 노예의 삶 경계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는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불린다.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은 “철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지 스피노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생전에 거의 주목받지 못한 그의 철학은 20세기 중후반부터 재평가돼 ‘스피노자의 귀환’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신과 자연, 정신과 자유, 지성과 국가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니체와 프로이트 등에게 영감을 안기며 현대 철학과 사회 속으로 파고들었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대표로 손꼽히는 질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철학자들의 예수’라고 부른 이유다.윤리학을 뜻하는 《에티카(Ehtica)》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는 책이다. 개인, 자유, 진리에 대한 각성이 분출되고 있는 요즘 한국에서도 ‘스피노자 읽기’가 확산되고 있다. “진리 포기하면 노예의 삶 못 벗어”네덜란드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스피노자의 삶은 힘겹고 파란만장했다. 어떤 구도자보다도 처절하고 비타협적으로 자유와 진리를 좇은 결과였다. 17세기 절대왕정 시대를 살아낸 스피노자는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했고, 그의 사상은 금기시되기까지 했다. 모든 학문과 철학이 권력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 시대에 개인과 자유를 철저하게 옹호했기 때문이다. “야훼는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유대사회로부터 스스로 고립되고 추방당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권력자들은 시대와의 불화에 개의치 않고 비판적 자유정신을 설파한 스피노자를 압박하고 핍박했다.스피노자의 대표 저작 《에티카》는 자유의 본성을 밝히고 자유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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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치가 100만 명 먹여살려"…'악덕'이 경제번영 이끈다 주장

    “사치는 가난뱅이 100만 명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100만 명을 먹여살렸다.”“잘살고 못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개인의 악덕(惡德)은 사회의 이익이 될 수 있다.” “사치는 가난뱅이 100만 명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100만 명을 먹여살렸다.”(버나드 맨더빌)18세기 초 영국은 경제 자유가 확대되고 상업과 금융이 발전하면서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일각에서는 물질 추구, 이기심, 탐욕이 만연하고 과도한 사치와 낭비가 도덕을 파괴시켜 사회적 분열을 초래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도덕 개혁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 무렵 악덕으로 여겨지던 이기심과 사치가 오히려 번영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며 도덕 개혁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다.맨더빌의 대표작 《꿀벌의 우화: 또는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입에서 발생하는 ‘돈과 도덕’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우화(寓話) 형식을 빌려 때로는 시로, 때로는 대화하는 방식을 통해 상업사회의 출현으로 야기된 도덕문제를 예리하게 진단했다. 맨더빌은 1705년 펴낸 풍자시 《투덜대는 벌집》에서 ‘악덕이 사라지면 잘살던 사회도 무너진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여기에 주석 20개를 달고 ‘미덕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글을 추가해 1714년에 출간한 책이 《꿀벌의 우화》다. 맨더빌의 핵심 주제인 ‘개인의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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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정치에 종속되면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문화·사회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한 네 권짜리 방대한 저작이다. 미술사를 중심으로 소설 음악 영화 등 많은 예술 분야를 사회사적 방법론으로 해석해낸 거의 유일한 책으로 손꼽힌다. 하우저는 미적 완성도나 작가의 기교를 넘어 예술작품을 ‘시대와 사회관계 속에서 빚어진 산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이런 접근은 문명과 사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천재와 걸작 중심으로 쓰이던 예술사에서 ‘작품을 소비하는 수요자’를 발견하고, 주체로 등장시킨 것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기여다. ‘신비의 영역’에 있던 예술을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이끌어냈고, 이는 인접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인상파·고딕은 사회 진보의 산물”1951년 출간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선사시대부터 20세기 대중영화 시대까지 인간·사회·예술의 관계를 풀어냈다. 예술사가이자 문학사가였던 하우저는 미술 문학 철학 미학 역사 등을 넘나드는 박학다식과 통섭적 시각으로 예술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준다.하우저는 작품이나 사조를 대할 때 반드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고대 동굴벽화, 영웅들의 서사시, 귀족 여성들의 연애소설, 계몽시대의 시민극, 현대 대중영화는 모두 당시 사회와 시대적 요구를 최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도 천재도 시대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인상주의 사조를 ‘가장 도시적인 예술’로 해석하는 대목에서 그의 예술관이 잘 드러난다. 하우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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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조작하는 권력은 미래가 없다…통제사회 비판

    “현대전의 1차적인 목적은 전반적인 삶의 수준을 높이지 않으면서 공산품을 소진하는 데 있다.”“언어의 제한은 사고의 폭을 좁히고 단순화시켜 체제에 저항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사상통제 수단이다.”‘디스토피아(dystopia)’는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와 반대되는 가상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68년 영국 의회 연설에서 영국의 아일랜드 억압을 비판하며 처음 사용했다. 디스토피아의 전형인 통제사회는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소재가 됐다.조지 오웰(1903~1950)이 1949년 발표한 《1984》는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체제 아래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말살되고 파멸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웰의 마지막 작품으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우리들》과 더불어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오웰은 사회주의자였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통일노동자당 민병대에 입대해 파시즘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곳에서 체감한 것은 스탈린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의 위험성이었다.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스탈린 체제를 예리하게 풍자한 《동물농장》을 펴내 일약 명성을 얻었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는 2차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소련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분위기여서 출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1949년은 냉전의 광기가 전 세계를 덮치던 시기였고, 《1984》는 소련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다. 자유 억압한 스탈린 전체주의 비판오웰이 《1984》에서 그린 미래 세계는 육체적 자유는 물론이고 인간의 사고나 감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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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 없는 신좌파, 예고된 실패 맞을 것"…이념 시대 퇴조 예언

    대니얼 벨(1919~2011)이 쓴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서구 사회에서 급진적 변혁에 대한 기대가 한창이던 1960년에 출간됐다.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을 강의한 보수성향의 벨은 진보성향의 놈 촘스키와 함께 전후 미국을 대표한 지식인이다.벨은 이 책에서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변화를 심층 진단하고, 그에 바탕해 이념의 시대가 퇴조할 것임을 예견했다. 한국전쟁으로 문을 연 1950년대는 이념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좌파(트로츠키주의)에서 전향한 벨은 급진사상이 설 자리를 잃고 있으며, 조만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술(테크놀로지) 발달과 경제·정치체제의 진화 덕분에 빈곤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의지가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벨이 말한 종언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시즘 파시즘 등의 급진적 이념이다. 당시 세력을 급속 확장 중이던 신좌파의 여러 이념도 얼마 못가 정당성과 호소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중’ 등장에 계급투쟁 시대 끝나《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출간된 때는 동서냉전이 무르익던 시절이지만 벨은 마르크시즘이 이미 화석화된 이데올로기가 됐다고 판단했다. “화이트칼라로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를 위시한 ‘대중’의 등장이 이데올로기에서 강조하는 전통적인 노동자와 계급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설명이다.벨은 “최소한 서양의 역사는 마르크스의 예언을 뒤집었다”며 급진 사상의 종말을 예고했다.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의 전사(戰士)가 아니라 대중사회의 주역으로 변모했다는 게 핵심 이유였다. 여러 변혁이론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노동계급 절대 궁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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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 중시해야 진실 보여"…실증학문 토대 놓은 논리학 저서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사상과 지식은 2000년 동안 서구 사회의 ‘진리’였다.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는 그의 단언을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직접 실험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아리스토텔레스 제국’에 반기를 든 최초이자 대표 주자다.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기관(Organum)》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신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식 관념성에서 벗어나 사실에 기초한 실증학문으로 나아가야 새로운 인류 문명을 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손이 도구를 활용하듯, 진리 창조기관인 인간 정신도 ‘귀납법’이라는 도구로 무장할 것을 강력 주문했다.17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때 베이컨은 그 문을 연 사람이며 《신기관》은 근대과학 정신의 초석을 마련한 저작으로 꼽힌다. 그 문으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들어왔고, 뉴턴이 입장하며 17세기 ‘천재의 세기’(영국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꽃을 피웠다. 종래의 사변적 경향에 제동이 걸리고 실증적 학문의 권위가 고양돼 근대정신과 과학혁명의 여정이 시작됐다.《신기관》은 개별적 사실이나 원리로부터 더 확장된 일반적 명제를 이끌어내는 ‘귀납법’이야말로 세상의 진실을 발견하는 요체라고 주창한다. 이런 생각은 서구철학사 2대 조류의 하나로,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경험론’을 탄생시켰다. 이 책이 ‘합리론 시조’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비견되는 이유다. 관념론에 반기든 근대정신의 정수《신기관》 이전의 철학·학문 세계는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