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파울루 코엘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루 코엘류에게는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83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소설 3억2000만 부가 묵직한 울림을 줘 ‘영혼의 연금술사’로도 불린다. 2009년 <연금술사>로 기네스북 ‘한 권의 책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가’ 부문에 올랐다. 요즘 ‘SNS에 가장 많은 팔로어를 보유한 작가’라는 수식어도 생겼다.<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1998년 출간된 이후 50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제작됐고, 소설 내용이 모티프가 된 밴드 곡도 탄생했다.
194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파울루 코엘류는 17세 때부터 세 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청년기에 록밴드를 결성하고 극단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히피 문화에 심취했다. 1973년 친구와 함께 창간한 만화잡지가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두 차례 감옥에 수감돼 고문당했다. 뜨겁고 혼란스러운 청춘을 보낸 코엘류의 열정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고스란히 묻어난다.유예된 1주일의 행보스물네 살의 베로니카는 왜 죽기로 결심했을까. 젊음, 아름다운 외모, 매력적인 남자친구, 안정적인 직업, 사랑하는 가족까지 표면적으로 그녀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자기 삶을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다. 젊음이 가고 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자신이 그 상황을 막을 도리가 없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는 점 때문에 삶과 초연히 작별하기로 했다.
사춘기는 뭔가를 선택하기에 너무 이르고, 어른이 되자 뭔가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체념한 그녀가 수면제 네 통을 삼킨 뒤 눈을 뜬 곳은 정신병원 ‘빌레트’였다. 몸 여기저기 주삿바늘이 꽂혀 있고, 심장과 머리에 전극이 연결된 채. 응급실에서 닷새, 입원실에서 2주간 누워 있었던 베로니카는 눈을 뜨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심장 손상으로 길어야 1주일 정도 더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유예된 1주일, 살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는 베로니카의 생기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난 미친 여자로 남고 싶거든. 다른 사람들이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내가 꿈꾸는 대로 내 삶을 살고 싶거든”이라고 말한 우울증 환자 제드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는 자신을 정상이라고 믿는’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마리아는 공황장애가 완치됐지만 빌레트에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며 퇴원을 미룬다. 1주일 시한부를 치열하게 사는 베로니카와 대화하다 용기를 얻은 65세의 마리아도 모험을 찾아 떠난다.
에뒤아르는 베로니카가 광적으로 피아노를 칠 때 유일하게 곁을 지키는 관객이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에뒤아르는 끝끝내 안정된 외교관이 되라고 호소하는 부모 때문에 꿈을 포기했고, 다음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다 찢어버리고 방구석에서 오돌오돌 떨다가 정신병원에 실려 왔다.너 자신의 길을 되찾게 하는 것삶이 단 하루 남은 시점, 베로니카와 에뒤아르는 빌레트를 벗어나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보낸다. 베로니카가 자기 모습을 그려달라는 것과 계속 그림을 그리라는 당부를 하지만 에뒤아르는 자신 없다고 말한다. “너로 하여금 너 자신의 길을 되찾게 하는 것, 그게 내가 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야. 내 삶이 아무 소용도 없었다고 느끼게 만들지 마”라고 말한 뒤 잠든 베로니카는 다음날도 죽지 않고 깨어났고, 에뒤아르는 “기적이야, 하루를 또 살 수 있어”라고 외친다. 베로니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이고르 박사가 시행한 기발한 실험이 성공했다는 걸 모르는 두 사람 앞에 기적은 매일 펼쳐질 것이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왜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려는 걸까?”라는 간호사의 질문에 베로니카는 “내 안에 내가 사랑할 수도 있는 다른 베로니카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라고 답한다. ‘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용기 있고, 언제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돼 있는 베로니카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에 박수를 보내다가 문득 내 삶을 돌아보며 용기를 얻는다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