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레이먼드 카버《대성당》
미국의 체호프로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는 1980년대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버는 여러 권의 시집과 소설집을 냈는데 〈대성당〉은 수십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카버의 소설들은 미니멀리즘을 대변하는 듯한 단순·적확한 문체로 미국 중산층의 불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작품마다 등장인물과 스토리가 다르지만 마치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덕분에 로버트 알트만 감독은 카버의 단편소설 여러 편을 조합해 《숏 컷》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버를 “나의 가장 소중한 문학적 스승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문학적 동반자였다”고 고백했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의 번역자이고 그의 작품을 일본에 소개했다는 점이 미국 진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12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대성당》의 한국 번역본은 유려한 문장가인 소설가 김연수가 맡았으니 문학적 향취를 듬뿍 느끼며 카버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938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가난한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카버는 19세에 16세 소녀와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연년생 두 아이를 낳은 아내는 한참 후에야 대학에 진학했고, 카버는 에세이〈불〉에서 가족을 부양하느라 지독하게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 번도 자전적인 것을 쓴 적은 없지만 내 작품은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것들”이라고 말했다. 소통과 단절을 그린 그의 작품은 뒤죽박죽이 된 인생 행로를 푸는 과정에서 탄생한 셈이다. 맹인에게 대성당을 설명하라1979년 두 번째 아내가 된 테스와 함께하면서 안정을 찾은 카버는 “너무나 충만하고 보람차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1988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카버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 살아남는다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했는데, 소통과 희망을 전하는 두 단편은 두 번째 삶이 반영된 책 《대성당》에 실려 있다.
단편소설 〈대성당〉의 스토리는 간결하다. 결혼 전에 맹인 돕는 일을 했던 아내는 결혼 후에도 그 맹인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다. 맹인은 상처를 한 후 나의 집을 방문한다. 나는 아내와 맹인의 친밀한 대화를 들으며 함께 하려 하지만 여의치가 않다. 아내가 소파에서 스르륵 잠든 뒤 나는 맹인과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곧 중단되고 만다. TV를 켰을 때 대성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고, 나는 맹인에게 대성당을 설명하려 애쓴다. 마음과 달리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연필과 종이를 요청한 맹인은 나의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려보라고 말한다. 그래도 뜻대로 안 되자 답답하기만 하다. 잠에서 깬 아내는 손을 부여잡은 두 사람이 대체 뭘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때 맹인이 말한다. 눈을 감아보라고. “감았나?”라고 확인한 맹인이 “속여선 안돼.”라고 다짐한다. 내가 감았다고 하자 맹인은 “이제 멈추지 말고. 그려.”라고 말한다. 눈을 감은 나의 손과 맹인의 손이 포개져서 움직인다. 어느 순간 나는 집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맹인이 눈을 뜨라고 하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어때?” 맹인이 물을 때 나는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고 답한다.
서로 마주봐도 갑갑한 사이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이 되는 관계,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눈을 감고도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은 또 어떤 것일까. 시대를 초월한 소설가〈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생일날 뺑소니 사고를 당한 아이와 안타까운 부모의 얘기다. 아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눈을 감고 만다. 아이의 생일케이크 주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던 부부는 빵집 주인의 전화에 화를 내며 달려간다. 그곳에서 따뜻한 차와 고소한 빵을 대접받은 부부의 마음이 비로소 따뜻해진다. 답답한 병원과 새벽의 빵공장, 두 군데 묘사로 진한 감동을 안기는 작품이다.
카버는 ‘끔찍한 일을 다룰 때에도 내적 독백처럼 심리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간결하게 표면만 묘사하는 방식’인 ‘더러운 리얼리즘’의 선두주자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안정을 찾으면서 시대를 초월한 소설가로 다시 태어났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세밀하게 펼쳐지는 카버의 소설을 열심히 읽다 보면 하루키처럼 ‘소중한 문학적 스승’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