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스 카네티《군중과 권력》
엘리아스 카네티
(1905~1994)
노벨문학상을 받은 불가리아 출신 영국 작가로 군중의 본질을 폭넓은 시각으로 조명했다.
엘리아스 카네티 (1905~1994) 노벨문학상을 받은 불가리아 출신 영국 작가로 군중의 본질을 폭넓은 시각으로 조명했다.
“밀집 속에서는 가깝게 느끼고 커다란 안도감을 얻게 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이 ‘축복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한다.”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군중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숭상한다. 그들은 모두 시체 더미의 왕이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예술과 철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은 왜 그런 끔찍한 범죄에 참여하고, 또 침묵했을까. 포악한 권력자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집단학살은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미스터리이자 공포로 기억된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거주하다가 ‘군중’의 위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 강렬한 충격이 계기가 된 35년 연구의 결과물이 《군중과 권력》이다. 군중의 본질을 폭넓은 시각으로 조명한 이 저작을 아널드 토인비는 “인간사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군중 속 안도감은 순간의 환상일 뿐”
[다시 읽는 명저] 군중은 평등·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밀집한다
카네티는 위협적 군중이 형성되는 이유를 “생존 본능의 발동”이라고 진단했다. 인간은 광활한 평원 위에 서서 돌아가는 풍차와 같다는 게 그의 관찰이다. “풍차와 이웃 풍차 사이에는 간격이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삶은 이 간격 속에서 펼쳐진다. 재산, 지위, 계급 등이 간격을 만들고 확대시킨다. 함께 모여야만 이 간격이 주는 중압감과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다.” 군중이 밀집상태를 선호하는 이유다.

《군중과 권력》은 밀집된 군중이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방전(放電)’을 꼽는다. 방전은 카네티가 재정의한 용어로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군중이 서로의 간격을 제거하고 평등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밀집 속에서는 가깝게 느끼고 커다란 안도감을 얻게 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위대할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이 ‘축복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한다.”

군중은 가능한 모두를 받아들이는 속성 때문에 쉽게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렇게 염원했고 또 행복했던 방전의 순간은 근본적으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평등감을 느끼지만 실제로 평등한 것은 아니며, 영원히 평등해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침대에 누울 것이며, 가족을 이탈하지도 않는다.”

카네티는 군중이 존속하려면 ‘방향’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군중은 늘 와해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목표가 제시되더라도 받아들이려 하며 목표가 있는 한 존재를 이어간다. 카네티가 본 군중의 가장 큰 특성은 파괴욕이다. 견고한 외형을 통해 영속성을 상징하는 동상이 종종 대중의 목표물이 되는 이유다. “동상 파괴는 더 이상 수긍할 수 없는 위계질서와 간극을 파괴하는 행위”다. 파괴의 수단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는 ‘불’을 지목했다. “불은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가져와, 불이 난 뒤에는 어떤 것도 전과 같을 수 없다. 불길이 번져가는 한 사람들은 군중으로 몰려든다.”

카네티는 군중에서 출발해 군중과 권력의 상호관계를 파헤치는 쪽으로 연구를 넓혔다. 어느 한쪽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면, 다른 쪽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군중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숭상한다. 그들은 모두 시체 더미의 왕이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권력자는 지속적으로 군중에게 제물을 던진다고 봤다. 군중은 달성 가능한 목표가 손에 잡힐 때 쉽게 모이고, 동일한 성격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더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카네티에 따르면 많은 경우 군중의 목표는 ‘살생’이다. 처형된 제물의 권력이 클수록, 그와 군중의 간격이 클수록 방전의 흥분은 더 강렬해진다. 제물과 자신의 위치가 역전됐다는 만족감도 더해진다. 군중은 인간이면 모두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심리상태를 갖는다. “제물을 향해 전진하고 처형함으로써 군중은 각자의 죽음을 벗어나려 한다. 제물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을 가진 군중은 ‘공동 살생’을 안전한 것으로 인식한다.” ‘초(超)인플레’ 군중경험의 위험성《군중과 권력》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한 군중 경험의 위험을 경고한다. ‘신뢰의 상징’인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도 저하됐다고 느껴 쉽게 무리지어 뛰어든다는 설명이다. “추락한 수백만금의 화폐처럼 인플레이션은 수백만 군중의 밀집을 자연스럽게 만든다”고 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이런 사회학적 심리는 나치가 유대인에 대한 군중의 증오를 증폭시키는 기제로 악용됐다. 돈의 가치에 대한 불신이 커지자 히틀러는 돈 관리에 뛰어난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전략으로 대중의 불만을 다스렸다. 최종적으로는 돈의 가치 추락으로 무감각해진 국민에게 유대인은 ‘살생해도 무방한 해충’의 이미지를 불어넣었다는 게 카네티의 분석이다.

카네티는 “권력의 가장 깊은 핵심에는 비밀이 있으며, 그 비밀이 많을수록 권력은 고립된다”고 봤다. 비밀을 숨기는 권력은 군중의 질문에 침묵하게 되고 그럴수록 위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권력과 군중 간의 이런 긴장을 완화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비밀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고, 그로 인해 권력은 약화되고 긴장도 해소된다”

백광엽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