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물과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
공간은 인물과 유기적으로 얽혀 심화된 세계로 이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식민지시대 경성,
'관촌수필'의 토속 방언 무대인 충청도 농촌 부락,
'여수의 사랑'의 두 여성 주인공들에게 다르게 다가오는 여수…
소설의 공간을 읽어보자
권태로운 경성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물과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
공간은 인물과 유기적으로 얽혀 심화된 세계로 이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식민지시대 경성,
'관촌수필'의 토속 방언 무대인 충청도 농촌 부락,
'여수의 사랑'의 두 여성 주인공들에게 다르게 다가오는 여수…
소설의 공간을 읽어보자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이다. 이는 작품 속에서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어 보자. 구보는 정오 무렵 집을 나와 종로통을 걷다가 전차를 탄다. 전차에서 이전에 선본 여자를 발견하고 행복과 사랑과 고독에 대해 생각한다. 고독을 피하기 위해 약동하는 사람들을 찾아 경성역으로 가지만 그곳은 도시의 냉기로 가득 차 있다. 이후 다방에서 시인이자 신문기자인 친구를 만나서 생계를 위해 기사를 쓰는 고충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평을 듣다 권태감을 느끼기도 한다. 친구와 헤어진 후 거리를 거닐던 구보는 밤 깊은 시간 술집에서 다른 벗과 술을 마시다가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귀가한다.
이 소설은 플롯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없이 주인공은 이동하는 장소나 만나는 사람을 계기로 내적 상념을 분출하거나 과거를 회상한다. 소위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술이 인과성과 필연성에 기초한 기존 소설의 서사 구조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구보의 산책기인 동시에 당대 제1의 도시 경성의 기록도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 식민체제에 저항하여 관료가 되지 않고 실업자로 남기도 했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들의 산책은 즐거운 일상이 아니라 우울한 배회로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구보가 헤매고 다니던 도시 경성이 아닐까 싶다.
농촌과 근대화 공간
수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있는데 농촌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없을 리 없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다. 관촌은 충청도 대천 관촌부락을 가리키며 이곳은 이문구의 고향이다. 박태원이 모던보이라면 이문구는 충청도 사내다. 자전적 색채가 짙은 이 소설에서 이문구는 일제시대와 6·25전쟁, 근대화 및 산업화로 이어지는 굴곡진 현대사를 성실하고 우직하게 살아 낸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관촌수필』은 사라져가는 언어를 소설로 복원시킨 작품으로 그 자체로 토속어의 보물창고라 하겠다. 지역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느긋하고 구수한 문체의 이면에는 농촌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온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깔려 있다. 이제는 사라진 전근대, 서로 돕고 위하는 인정미 넘치는 세상에 대한 향수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 정서는 다소 복고적이며 변화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의 탐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작가가 쓴 충청도 배경의 이 소설은 은근하고 도저한 지역적 색채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농경민족의 후손인 우리의 폭넓은 공감을 획득하고 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에는 정선과 자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정선의 고향은 여수이다. 정선이 월세를 아끼기 위해 구한 룸메이트 자흔의 고향도 여수다. 아니, 여수로 추정된다. 추정이라 말하는 것은 두 살배기 자흔이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유기되었기 때문이다. 보호 기관에 살다가 입양과 파양을 거쳐 전국을 떠돌며 살아온 자흔과 5살 때 엄마가 죽고 7살 때 주정뱅이 아버지의 동반 자살 시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정선. 둘은 척박한 삶을 살았고 심리적 병증이 있으며 젊은이답지 않게 피로에 젖어 있다.
그런데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여수에 대한 둘의 입장은 다르다. 정선에게 여수는 동생을 집어삼킨 바다가 있는 곳,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자흔에게 여수는 오랜 방랑 끝에 간신히 찾은 고향이다. 자흔은 여수 앞바다 해안의 시골 마을, 타고 가던 버스가 고장 나서 우연히 내리게 된 후락한 그곳을 걷다가 눈물을 흘린다. 버려진 부두의 누더기 같은 천막, 더러운 판자떼기들, 염소 울음소리, 새소리, 바람, 두엄 냄새 속을 걷다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품속에 돌아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이다. 자흔이 정선의 결벽증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자 정선은 자흔을 찾아 여수로, 고통의 뿌리인 동시에 존재의 뿌리인 그곳으로 향한다. 우연히 만났지만 쌍생아나 다름없는 둘의 사랑은 결국 여수에서 배태되었다.
여수는 전라남도의 바닷가 도시이다. 바닷가 도시가 여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수가 아니라면,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여수(麗水)가 아니라면 정선과 자흔의 여수(旅愁)를 설명할 길이 없다.
공간과 인물의 의미
이렇듯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공간은 인물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사건과도 한몸이다. 공간과 인물과 사건. 이들은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육체가 되어 작품을 구성한다. 공간에 주목하여 소설을 읽으면서 한 차원 심화된 작품 감상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