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사설] 판교를 '실리콘밸리'로 키우려면, 수도권 규제부터 깨야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2018벤처서머포럼’ 기조강연에서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판교 테크노밸리가 여전히 교류가 부족하고 폐쇄적”이라며 “주변에 경쟁력을 갖춘 대학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간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당시 택지 개발이 중심이 되면서 기업과 대학 간 교류를 통한 시너지 효과 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여기저기서 제기돼 왔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제2, 제3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계획에도 대학 입주가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혁신 클러스터는 거의 예외 없이 대학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스탠퍼드대, UC버클리 등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동부 보스턴 지역에는 하버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이 혁신기업을 끌어들이고 있고, 리서치트라이앵글(RTP)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노스캐롤라이나대, 듀크대 등이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제2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뉴욕시가 코넬테크와 손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실리콘밸리를 따라잡겠다”는 중국의 중관춘에도 베이징대, 칭화대 등 40여 개 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판교를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만들겠다는 정부가 대학의 입주 필요성을 모를 리 없다. 대학들 역시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당시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그럼에도 대학들이 판교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도 ‘성역’으로 간주되는 수도권 규제 때문이다. 수도권 대학은 지방 말고는 분교를 세울 수 없고, 지방 대학은 수도권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이러니 대학 입장에서 보면 판교 테크노밸리는 ‘섬’이나 다름없다.
산학협동은 혁신 클러스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를 통해 기업과 대학이 모여들고 지식과 정보 교환이 활성화돼야 혁신 클러스터가 성장할 수 있다. 그런 기능과 교류가 전혀 없이 빌딩만 즐비하다면 ‘혁신 클러스터’가 아니라 ‘부동산 단지’라고 불러야 맞을 것이다. 이웃 일본만 해도 도쿄 일대가 신기술의 거대한 실험지로 변할 정도로 수도권 규제를 깨기 바쁘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한국만 낡은 수도권 규제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9월4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첨단 IT화와 4차산업혁명으로
도시화와 집적화 필요성 커져
규제 풀어 대학 등 유치해야
미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중국과의 ‘무역전쟁’도 말이 전쟁이고, 일부 언론 표현이 ‘주요 2개국(G2)’일 뿐, 미국 완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공정·개방’ 취지에 맞지 않다는 논란도 없지 않지만, 미국의 강펀치에 중국 경제 자체가 휘청거릴 정도다. 그만큼 미국의 국력은 막강하다. 미국 공세에 맞서 중국은 퇴로 찾기에 급급하다. “미국의 고(高)관세 부과가 불합리하다”고 중국은 불만을 표시하지만, 중국도 ‘사드 보복’에서 한국을 향해 막무가내로 해왔다.
“아직 중국은 미국에 맞설 상대가 아예 안 된다”는 국제 전문가들 분석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어디서 비롯된 국력일까. 월가의 힘인가. 전통의 국방력인가. 세계 최대의 곡창에 셰일가스까지 끌어올리는 자원대국의 힘인가. 미국 건국 이념과 민주주의 정신까지 여러 가지가 복합적이겠지만, 실리콘밸리 기술력을 빼고는 미국의 힘을 말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실리콘밸리는 수많은 나라가 추종하는 성공 모델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시스템으로 세계 컴퓨터산업을 주도했던 곳이다. 웬만한 작은 국가 경제력보다 더 큰 애플과 구글도 길러냈다. 유통망의 공룡 아마존 본사가 있는 시애틀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실리콘밸리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성공을 꿈꾸는 전 세계 청년들에게 아성 같은 곳이다.
실리콘밸리는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식으로 성공했으며, 어떻게 진화하고 있나에 대해서도 무수한 연구가 있었다. 우리 정부도 판교를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키워보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설의 강조점은 규제 완화, 특히 수도권 규제 완화다. 한국의 수도권은 유별나게 규제를 많이 받고 있다. 인구 집중 및 교통 관련 규제, 한강 주변에서의 환경 규제, 군과 관련된 보안 규제 같은 입지 규제가 대표적이다. 수도권 인구 집중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서울로 경제력 집중 자체를 막겠다는 쪽으로 변했다. 산업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도시화가 불가피하지만 한국에서는 이게 부인된다.
강고한 수도권 규제가 굳건히 유지되는 것은 지방 쪽 견제가 매우 심한 요인도 있다. 역대 정권이 수도권 규제 완화로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으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지방의 지자체와 지역 출신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이에 반대해왔다. ‘균형 발전’의 구호는 그만큼 강했다. 전국 각지에 ‘혁신도시’가 세워지고, 공기업과 국가기관을 일괄적으로 분산시킨 것도 그런 요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업도, 대학도, 병원도 수도권을 선호하는 추세는 그대로다. 청년들을 비롯해 고급 인력의 서울 집중도 오히려 강화된다. IT화, 4차 산업혁명 진행이 도시화와 집적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이 근래 수도권 규제를 확 푸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수도권 규제를 그대로 두면 공장도, 대학도 신설이 어렵다. 정부가 판교를 실리콘밸리처럼 키우겠다고? 근본 해법을 봐야 한다.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