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공을 세운 무인이
은퇴 후 가난하게 산다

권위도, 경제력도 없으니
양반도 예전같지 않다

추상적 관념어 사라지고
일상을 일상어로 생생히 묘사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산문이 움튼다
[문학이야기(20)] 박인로 《누항사》
박인로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시가인(詩歌人)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의 막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 성윤문에게 발탁되어 종군하였으며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을 지내며 군비를 증강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났고 가사 문학 발전에 기여한 그의 작품 중 ‘태평사’ ‘선상탄’ ‘누항사’ 등은 우리에게 꽤 친근하다. ‘태평사’는 1598년 왜군이 퇴각하자 사졸의 노고를 위로하려 지었으며 ‘선상탄’은 1605년(선조 38년)에 부산에 통주사로 부임한 뒤 전선에서 종전과 평화 염원을 노래한 작품이다. 셋 중 가장 나중 지어진 ‘누항사’는 1611년(광해군 3년) 51세 때 벗 이덕형이 고향에 돌아가 살던 작자에게 두메에 사는 어려움을 묻자 그 답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문학이야기(20)] 박인로 《누항사》
작품에 드러난 화자의 삶은 몹시 곤궁해 보인다. 그의 가난이 실감나게 그려진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소를 빌리러 갔다가 거절당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그 어찌 와 계십니까?/ 해마다 이렇게 하기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가난한 집에서 걱정이 많아 왔습니다./ 공짜로나 값을 받거나 간에 빌려 줌직도 하지마는,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사람이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이 끓어오르게 구워 내고 갓 잇은 삼해주를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이러한 은혜를 어찌 아니 갚을 것인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굳게 약속하였기에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 말씀하기 어렵구려./ 진실로 그렇다면 설마 어찌하겠는가. 헌 모자를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어슬렁어슬렁 물러나오니 풍채 적은 내 모습에 개만 짖을 뿐이로다.>
[문학이야기(20)] 박인로 《누항사》
여기서 우리는 일단 화자가 직접 농사를 짓는다는 것, 그리고 농사지을 소도 없을 정도로 아니, 꿩이나 술이 없어서 이웃에 소를 빌리지도 못할 정도로 가난했음을 알 수 있다. 명색이 종군하여 공을 세운 무인이 은퇴 후 이렇게 가난해도 좋을까 민망할 지경이다. 임진왜란 후의 조선은 조선 전기와는 같은 나라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세상으로 보인다. 이전 세기의 엄격한 신분 질서는 붕괴되고 경제적 지위가 낮은 양반은 존경받지 못한다. 화자는 사대부로서의 권위도 지니지 못하고 농민으로 살아갈 조건도 갖추지 못하여 이중으로 소외된 양반 계층의 고통을 절절히 겪고 있다.

그리고 이런 괴로움을 가식 없는 일상어로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전의 강호가도들에서 흔히 보이던 추상적인 관념어는 사라졌고 정철의 작품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서정적 미문도 없다. 일상을 일상어로 생생하게 묘사했을 뿐 아니라 상술한 인용 장면에서 보듯 사건을 인물 간 대화를 통해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마치 사실주의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서사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소재, 서술방식 및 표현 기교 등에서 박인로의 가사는 이전 시기의 것과는 크게 다르다. 말하자면 조선 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문학이야기(20)] 박인로 《누항사》
그러나 이 작품의 사상적 바탕은 전 세대의 양반 가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극빈의 한가운데에서도 박인로는 안빈낙도라는 낡은 도(道)를 놓지 않는다. 다음의 시구들을 보자. <교양 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려 다오, 갈대꽃 깊은 곳에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벗이 되어, 임자 없는 자연 속에서 절로절로 늙으리라. 무심한 백구야, 나더러 오라고 하며 말라고 하겠느냐?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것뿐인가 여기노라.> 그리고 유교적 충의사상은 여전히 박인로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의 핵심이다. <태평천하에 충효를 일로 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밖에 나머지 일이야 타고난 대로 살아가겠노라>라고 그는 포효하듯 노래한다.

말하자면 박인로의 작품은 소재와 표현 면에서는 사대부 가사의 한계를 벗어났으되 그 정신은 구시대의 지배적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가의 움을 틔웠다고나 할까. 그의 시대 이후 가사는 보다 왕성한 산문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변화해 간다.

서울사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