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한국경제신문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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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조성, 뇌물수수, 조세포탈, 범죄 수익금 은닉, 자금세탁 같은 범죄에서는 다른 사람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는 불법 차명거래가 이용된다. 금융실명제는 불법 차명거래를 막아 투명한 금융거래를 확보함으로써 범죄행위 자체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제도다. 1993년 8월부터는 실명 금융거래가 의무화돼 예금과 같은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됐음에도 세금 우대를 받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로 예금하는 경우와 같이 자신의 실명을 감추고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금하는 사례가 많다. 이렇게 다른 사람 명의로 은행에 예금하면 그 예금의 권리자, 즉 예금주가 누구인지가 문제 된다. 이에 답을 준 것이 대법원이 2009년 선고한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피고 측 “아내 명의지만 남편이 통장 개설”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들여다보자. OO저축은행에는 원고 명의로 4200만원, 원고의 남편 A 명의로 4900만원이 예금됐다. 원고 명의의 예금거래신청서 신청인란에는 원고 성명과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돼 있고 원고의 주민등록증 사본이 붙어 있다. 실명확인란에는 담당자와 책임자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다. 통장도 원고 명의다. 그러나 원고 명의의 예금거래신청서는 A가 작성했다. 거래 인감으로 A의 도장이 쓰였고, 비밀번호도 A의 정기예금에 사용하는 비밀번호와 같았다. 예금계좌의 이자는 A 명의 ××은행 계좌로 자동이체됐다. 원고 명의로 예금한 4200만원은 예금한 당일 A 명의의 다른 금융회사에서 인출한 돈이었다.

이후 OO저축은행이 부실화해 예금을 지급할 수 없었고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예금보험공사가 보험금을 지급하게 됐다. 예금자보호법은 하나의 금융회사를 기준으로 예금자 1인당 5000만원을 한도로 보험금을 지급한다. 예금보험공사는 원고 명의의 예금을 A의 예금으로 보고 A에게만 예금보험 한도인 5000만원을 지급했다.

원고는 “남편에게서 증여받은 돈을 예금한 것”이라며 예금보험공사는 예금주인 자신에게 예금액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인 예금보험공사는 “예금주 명의가 원고로 돼 있기는 하지만 A가 예금자보호법이 정한 보호 한도를 회피할 목적으로 원고의 명의를 빌려 계좌를 개설한 것에 불과하다”며 실제 예금주인 A에게 보험금을 한도인 5000만원까지 모두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명의 차용 엄격히 판단해야”

1·2심 법원에서는 예금 출연자인 A와 OO저축은행 사이에 예금 명의자인 원고가 아니라 A를 예금주로 하는 묵시적 약정이 있었다고 판단해 예금보험공사의 주장이 옳다고 했다. 1·2심 법원의 결론은 그때까지의 대법원 판결에 따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본인인 예금 명의자 의사에 따라 실명확인 절차가 이뤄지고 예금계약서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예금 명의자가 아니라 출연자 등을 예금 계약의 당사자라고 볼 수 있으려면 금융회사와 출연자 등의 사이에서 서면으로 이뤄진 예금 명의자와의 예금계약을 부정하고 출연자 등에게 예금반환청구권을 귀속시키겠다는 명확한 의사의 합치가 있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제한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금융회사 및 그 담당 직원이 금융실명제법 위반에 따른 행정상 제재와 향후 분쟁 발생 위험 등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와 같은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유가 인정돼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논리다.

이 판결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예금을 한 경우 예금 명의자의 채권자가 그 예금을 압류할 수 있기 때문에 명의를 빌린 출연자는 그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출연자가 세금 우대 혜택이나 예금자보호법을 적용받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위반해 명의를 차용하는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출연자의 부당한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법 개정… 과세회피 목적 악용 땐 처벌

[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5) 아내 명의로 남편이 만든 통장… 진짜 주인은 누구?
이 판결 이후 국회는 2014년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개정된 금융실명법은 누구든지 불법 재산의 은닉, 자금세탁, 조세포탈, 강제집행 면탈과 같은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차명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 대상이 된다.

아울러 이 판결 내용을 명확히 해 실명이 확인된 계좌에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은 명의자 소유로 추정하는 규정을 뒀다. 또 금융회사 종사자는 거래자에게 불법 차명거래가 금지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고, 금융회사 종사자가 불법 차명거래의 소개나 권유와 같은 행위를 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도록 했다.

심영 < 연세대 로스쿨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