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나라마다 고유한 어투와 뉘앙스가 있는데 우리는 외국문학을 '완벽하게' 읽고 있을까?
체크 포인트

▷일본어 ‘나와바리’는 ‘지리적 구역’과 달라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래 제목은 뭘까?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56)외국문학 번역
“번역은 반역이다(Traduttore, traditore).” 이탈리아 경구(警句)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정보’는 전달할 수 있더라도 원문 고유의 어투나 뉘앙스를 전달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원문에 쓰인 단어가 그 사회 특유의 ‘역사’나 ‘제도’를 전제하는 경우, 별도의 설명 없이는 번역문이 ‘이해 불가’인 경우도 있다. 인공지능 번역기가 분투해야 할 부분이다.

‘나와바리’라는 일본말이 있다. ‘일정한 지역, 혹은 구역’을 뜻하는 단어인데, 우리말에는 적절한 동의어가 없다. ‘지역’이나 ‘구역’은 지리적·공간적 개념이다. ‘나와바리’는 다르다. 이 말에는 ‘상점의 배달 구역, 한 가게의 상권이 미치는 지역’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일본 근대화 초기의 경제적 구조와 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일본과는 다른 사회발전 과정을 겪지 않은 한국인들은 이 단어의 원뜻을 일본인 수준으로 체감하기 어렵다. ‘단골’의 어원일 수도 있는 우리말 ‘당골’이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말이다. ‘당골’ 혹은 ‘당골판’은 주술사의 담당 구역을 뜻한다.

근대화 이전 샤먼은 농경 사회에서 상담사, 병 치료사의 역할을 담당했다.(물론 과학적인 처방을 내린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상담료’를 현금으로 내지 않고, 추수가 끝나면 ‘1년 분’ 상담료를 현물로 줬다. 무당이 지역 사회와 나름대로의 ‘인간 관계’와 ‘신용’으로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한 무당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동네가 ‘당골’ 혹은 ‘당골판’이다. ‘담당 구역’이라는 의미는 비슷하지만, ‘당골’에는 ‘나와바리’에 깃든 경제적 개념이 없다.

급격한 현대화를 거치며 우리 사회에서는 마을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던 ‘전속 무당’의 존재도 거의 사라졌다. 관습이 사라지니 ‘당골’이라는 말의 쓰임새도 변했다. ‘당골’이 ‘단골’로 발음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본뜻은 소멸하고, 지금은 ‘자주 찾아오는 손님’의 뜻으로 널리 쓰인다. 이래서는 ‘당골’을 ‘나와바리’의 번역어로 쓸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0년에 발표한 소설 《1973년의 핀볼》은 원문 그대로의 번역이다. ‘해석’이 스며들 틈이 없는 완벽한 번역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일본은 서기(西紀)보다 연호(年號)를 많이 쓴다. 예컨대 ‘1999년생입니다’라기보다 ‘헤이세이(平成) 10년생입니다’라고 하는 편이 일본인의 일상이다. 학교, 직장, 관공서에서도 마찬가지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쇼와(昭和) 39년’이고 2020년 도쿄올림픽은 ‘헤이세이 31년’이라고 해야 빨리 알아듣는다. ‘1973년의 핀볼’이라는 제목은 한국 독자에게는 1970년대 초반의 어느 날이 배경이겠구나 정도의 의미지만 일본 독자에게는 그 자체로 낯설고 서구적이며 이질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사회적 관습이 판이하기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붙인 제목을 접하고 일본 독자들이 느꼈을 생경함을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막스 베버의 강연을 모은 책 《Politik als Beruf》의 한국어 제목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최근에 나온 번역본은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제목을 달았다. 둘 다 원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번역이다. 하지만, ‘직업’과 ‘소명’ 사이에는 어감상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스키의 1946년 작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그러나 조금은 대책 없는 인물인 알렉시스 조르바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리스 원전의 제목은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인데, 이 소설을 원작으로 1964년 그리스, 영국, 미국이 합작으로 만든 영화의 한국어 제목이 ‘희랍인 조르바’다. 소설의 한국어 번역본도 같은 제목으로 출간됐다. 불세출의 번역가 이윤기 선생은 1980년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제목을 《그리스인 조르바》로 살짝만 바꿨다.

대신 기존 판본에 나오는 조르바의 대사 ‘주인님’을 ‘두목’으로 모두 고쳤다. 그 편이 야생마처럼 거친 남자 조르바의 성격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