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권·정교분리 개념 도입해 법 제정
"나의 업적은 전쟁이 아니라 세계시민법"
"나의 업적은 전쟁이 아니라 세계시민법"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5) 나폴레옹과 시민 법전](https://img.hankyung.com/photo/201606/AA.11880876.1.jpg)
프랑스의 자랑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5) 나폴레옹과 시민 법전](https://img.hankyung.com/photo/201606/AA.11880869.1.jpg)
탁월한 지휘관
나폴레옹은 탁월한 지휘관이었습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대장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뒤 밀라노 입성, 만토바 점령을 달성했고 1798년 5월 카이로에 입성한 이집트 원정 때는 ‘학자 부대’를 전장에 동반하기도 했습니다. 나일강 서쪽마을 로제타에서 발견된, 같은 내용이 이집트 상형 문자, 이집트 민중 문자, 그리스 문자 등 세 가지로 기록되어 이집트 고대 문명사 연구에 획기적인 장을 마련한 로제타스톤(진품은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도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의 부산물입니다. ‘고대의 영웅 한니발도 한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알프스를 넘어 유럽 대륙을 석권한 1800년의 원정도 전설적인 승전입니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5) 나폴레옹과 시민 법전](https://img.hankyung.com/photo/201606/AA.11880877.1.jpg)
하지만 대다수 역사가는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나폴레옹 법전’에 있다고 의견을 모읍니다. 법률집행에 있어 자유, 평등, 인권의 존중,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개념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시점이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권력자나 성직자가 자의적으로 백성들을 처벌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려면 법전이 완벽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법을 정비했습니다. 권력자나 성직자 마음대로가 아니라 법대로 판결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법전에 ‘시민 법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법전은 1804년부터 시행했고,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의 현대사적 의미는 이 법전이 오늘날 전 세계 시민법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재산, 평등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권’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재산은 ‘개인의 신체’입니다. 사적 재산권을 보호한다는 것은 따라서 인권을 보호한다는 의미와 통합니다. 내가 일군 재산을 누군가가 빼앗아가고, 내 신체의 자유를 누군가가 아무런 대가없이 징발하던 사회가 나폴레옹 이전의 세계였습니다.
영토점령이 목적 아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거둔 초창기 놀라운 승전의 원동력은 병사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영토를 점령하러 출병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알려주고 ‘법의 세계’로 초대하려 일어난 것이다”는 의식이 프랑스군을 관통하던 사명감이었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에는 ‘해가 진 다음에는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는 조문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권을 철저하게 보호한 것입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뒤 부관을 통해 남긴 자서전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진정한 업적은 승전했던 40차례의 전투가 아니다. 왜냐하면 워털루에서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업적 중에서 지울 수 없는 것, 나의 업적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 있다. 바로 ‘시민 법전’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나폴레옹에게 얼마간 빚을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파리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앵발리드도 한 번 방문해 보시기를. 위층에서 나폴레옹의 관을 굽어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관 주위를 돌아보시기를. ‘시민 법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