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그것이 알고 싶지?'

혁신가 알리, 헤비급에 스피드 도입…'아름다운 복싱' 추구
무하마드 알리(1942년 1월17일~2016년 6월3일)가 세상을 떠났다. 복싱 열기가 사그라진
우리나라에서는 잘 감지할 수 없지만, 전 세계 언론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 사나이를 추모한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은 “알리는 신의 영역에 들어섰던 유일한 복서였다”고 했다.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20세기 최고의 스포츠맨’을 뽑는 전 세계 스포츠평론가 투표에서도 알리는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펠레였다) 무엇이 알리를 스포츠를 넘어선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일까. 그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 ‘혁신’ 때문이다. 그의 일생은 경기 안팎을 넘어서며 혁신을 통해 사회와 만나고 역사와 조우한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3) 마하마드 알리 타계
20세기 최고의 스포츠맨

먼저 알리가 이룩한 경기 테크닉의 혁신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헤비급이라는 체급에 스피드와 풋워크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실제로 구현한 복서다. 스피드와 풋워크는 알리 이전에도 널리 쓰이던 기술이다. 하지만 헤비급에 통용되던 개념은 아니다. 스피드와 풋워크는 순발력의 산물이다. 순발력을 기르면 파워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알리 이전의 헤비급 복서들은 거의 모두가 파워를 기르는 데 훈련시간을 투자했다. 펀치력은 체중에 비례하지만, 맷집은 체중에 비례하지 않는다. 프로복싱 헤비급은 한계체중이 없는 무제한급이다. 스피드를 이용해 점수를 많이 벌어 놓아도, 결정적인 한 방이면 경기가 끝난다. 확률상 모든 선수가 파워를 증강하는 데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알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길을 열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상대방의 몸통을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 오직 안면만을 공격해도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알리는 빠르고 날카로웠다. 알리는 스피드가 극한에 다다르면 파워를 대신할 수 있다는 ‘역설의 미학’을 완성하고 구현한 사람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3) 마하마드 알리 타계
알리는 미디어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활용해 이미지를 구축한 최초의 인물이다. 무명 시절, 프로모터와 레슬링을 보러 간 자리에서 ‘지금 나오는 저 선수가 바로 모두가 싫어하는 악당’이라고 하자 알리가 ‘그렇지만 저 악당을 보기 위해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나요?’라고 되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1960년 로마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가 바로 알리였다. 그 당시에 이미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알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올림픽의 불을 밝혔다)라는 사실만으로는 데뷔 초 인기몰이에 충분하지 않았다. 알리는 경기마다 KO승 라운드를 예고하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예언이 맞아떨어지면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35전 전승(25KO)의 챔피언 소니 리스튼에게 도전한 19전 전승(15KO)의 22세 청년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유명한 일성을 터뜨린 뒤 절대 열세라던 예상을 깨고 7라운드 종료 KO승으로 왕관을 접수한다. 알리는 등극 다음날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슬람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다. 당시의 금기사항이자 미국의 사회적 화약고였던 인종문제를 향해 건설적으로 도발한 것이다.

리스튼이 빠르게 움직이는 알리를 거의 공격하지 못했지만, 8라운드 공이 울리자 의자에 앉은 채로 경기를 포기한 상황에 의문점이 있다고 하여 1년3개월 뒤 마련된 리턴매치. 알리는 경기 시작 1분 만에 리스튼을 단 한 방의 펀치로 쓰러뜨린다. 문제는 그 펀치를 ‘본’ 사람들이 극히 소수라는 사실이다. 슬로비디오 판독 결과 예비동작 없이 짧게 끊어 친 라이트 훅이 ‘발견’되었고, 사람들은 느린 화면으로만 볼 수 있는 주먹이었다고 하여 이 한 방에 팬텀펀치(phantom punch)라는 별칭을 선사했다.

베트남전 반대…선수자격 박탈

1965년 5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일곱 차례의 KO승을 포함, 세계 타이틀을 아홉 차례 방어한 알리는 1967년 4월 미국 정부로부터 선수 라이선스를 빼앗기고 1970년 10월까지 링에 오르지 못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월남전 징집 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알리는 그때부터 운동선수가 아니라 60년대 사회운동과 인종차별 철폐운동, 반전(反戰)운동의 상징으로 활동한다. 알리는 만난신고(萬難辛苦)를 겪고 1974년 세계 왕좌에 복귀한다. 그 고생담은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 기회를 빌리기로 하자.

알리와 펠레는 공히 ‘인간으로는 보여주기 힘든 움직임을 장기간에 걸쳐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도 알리가 펠레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이유가 있다. 펠레는 부상으로 쉰 적이 있지만 활동 자체를 금지당한 사실은 없다. 하지만 알리는 전성기의 최정점에서 3년6개월간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자격을 박탈당하기 1년 전에도 미국 내 경기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유럽을 돌며, 말하자면 홈 링이 아닌 곳에서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자의에 의해,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경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을 겪고도 다시 세계 정상에 복귀했다는 사실이 그가 보여준 경기 자체보다도 더 놀랍고 위대한 일이라고 전 세계 스포츠 평론가들은 입을 모은다. 모 스포츠 용품업체의 유명한 광고카피 ‘Impossible is nothing(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도 알리가 남긴 말이다. 챔피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