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21) 에베레스트 최초 등반자는?
역사는 화려했다. 명성도 여전했다. 팬들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리그 순위표 밑에서 두 번째가 그들의 자리였다. 1967년 이래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1979년에 이어 또 한 번 2부리그로 강등당할지도 몰랐다.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남자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시즌이 한창이던 1986년 겨울이었다.왜 산에 오르나…산이 거기 있기 때문
역사를 공부하다 가슴을 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이 분이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갔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독자들은 망자(亡者)의 ‘그릇된 선택’을 비판한다. 이것은 현대인이 저지르는 오류다. 당대를 살았던 과거의 인물들이 역사적 결정을 내리던 순간에 가졌던 정보량은 많지 않았을 터다. 적어도 결정권자들은 현대의 일반 독자가 알고 있는 사실에 비해서도 정보량이 적었다. 우리는 역사의 전개방향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몰랐다. 우리는 제3자고 그들은 당사자였다. 역사적 사실은 현대의 독자에게 흥미나 지적 탐구의 대상일 뿐이지만 당사자에겐 본인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확정된 사실’도 진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현대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고대사에만 ‘미지의 영역’이 ‘영구미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가장 먼저 등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1953년 제9차 영국 원정대 대원이던 에드먼드 힐러리(뉴질랜드·1919~2008)와 함께 간 도우미(셀파) 텐징 노르가이(1914~1986)가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두 사람 가운데 그래도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느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모두 미소로 화답했다, 평생 동안.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인류 최초로 지구 최고봉에 오른 등산가인가? 거의 그렇다고 인정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924년의 3차 원정대 때문이다. ‘왜 계속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조지 맬러리(1886~1924)는 정상 공격 도중 실종됐다. 중국 산악인 왕훙바오는 1979년 일본 등반가 하세가와에게 “1975년 에베레스트 등정 중 북쪽 루트에서 ‘2차 대전 이전의 복장을 한 영국기가 그려진 옷을 입은 시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에베레스트에선 시신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라 간단한 예만 표하고 무심히 지나쳤다고 말했다. 하세가와가 전설적인 등반가 맬러리의 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답하자 왕훙바오는 시신을 발견한 정확한 지점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그만 눈사태로 사망했다. 위치 추적의 단서가 사라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글로 남기며 ‘혹시 시신의 주인공이 맬러리가 아닐까’라고 추측한 하세가와도 에베레스트에서 생명을 잃는다. 당시 중국은 서방세계와 교류가 차단된 ‘죽(竹)의 장막’ 안의 나라였다(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때가 1979년이다). 중국 등산가의 ‘정보’가 유럽이나 미국으로 전해질 수 없었다.
맬러리 등정 뒤 내려오다 사망?
1960년대 중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이 ‘영국제 등반장비를 발견했다’며 미국 LA타임스와 인터뷰한 건 1981년이다. 1999년 영국 산악인 에릿 시몬스는 ‘시신 발굴과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국제 등반가 팀’을 꾸린다. 1999년 5월1일(네팔 현지시간) 마침내 그들은 시신을 찾는다. 엎드린 자세였고 신발이 벗겨진 채였다. 춥고 건조한 날씨는 맬러리의 시신을 미라처럼 보존해줬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속옷에 ‘조지 맬러리’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힐러리와 노르가이의 위업 29년 전에 맬러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을까? 1999년 당시는 긍정론이 대세였다. 산악전문가들은 시신이 정상 부근에서 발견된 점, 시신의 형태가 추락사의 전형이라는 점 등을 들어 맬러리와 어빈(동반 정상 공략에 나선 옥스퍼드대 학생 등반가) 조가 정상 정복 후 하산하는 과정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대원 노엘 오델(지질학자·1890~1987)은 사망할 때까지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영국의 산악인 크리스 보닝턴은 ‘유품에 사진기가 발견되면 좋겠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정상에 서 있거나 에베레스트 서쪽 경사면을 내려다보는 구도로 앵글이 잡혔다면 정상 정복이 확실하다’고 했다. 맬러리는 당시 최신 제품인 코닥 사진기를 갖고 갔다. 코닥사는 카메라가 발견되면 현상에는 기술적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진기 속 필름은 훼손 정도가 너무 심해 인화가 불가능했다. 1999년 당시 생존해있던 힐러리는 뉴질랜드 자택에서 한 BBC와의 인터뷰에서 “맬러리와 어빈은 위대한 등반가였다. 내가 정상등반 당시 채택한 등반 세부계획은 맬러리와 어빈의 세부 아이디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들이 정상에 올랐다면 인류 최초 등반자의 영예는 당연히 그들의 것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28명도 정상 밟았다
최근엔 맬러리 어빈 조가 등반에 실패했을 것이란 견해가 다수설이다. 발견된 의복, 등산화 등 장비수준이 열악하며 시신이 발견된 지점은 사다리 등 별도의 장비가 없이는 정상 등정이 불가능한 곳이라는 것이 주장의 근거다. 반대파들은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이 ‘덥다’고 느껴 신발을 벗는 증상이 있으니 맬러리의 사망 원인이 규명된 셈이고, 그렇다면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어빈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 증거라며 ‘정상정복 후 하산설’을 굽히지 않는다.
1977년 역사상 58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한국인 고상돈의 등반순서는 그렇다면 59번째로 바뀌어야 하는 걸까? 1999년 당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한국인 등산가는 모두 28명이었고, 그중 고상돈, 지현옥 두 대원은 맬러리처럼 산에 생명을 묻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