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20) 알렉스 퍼거슨: 나의 이야기'
역사는 화려했다. 명성도 여전했다. 팬들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리그 순위표 밑에서 두 번째가 그들의 자리였다. 1967년 이래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1979년에 이어 또 한 번 2부리그로 강등당할지도 몰랐다.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남자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시즌이 한창이던 1986년 겨울이었다.‘맨체스터 유나티드’의 신
그로부터 27년간 ‘이 남자의 팀’은 잉글랜드와 유럽에서 38차례나 각종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축구계의 모든 사람이 그 남자의 팀을 두려워했고, 모든 선수에게 그 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평생의 로망이었다. 그 남자의 전화를 처음 받고, 박지성은 한동안 현실감을 잃었다고 했다. 꿈이 현실로 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어느 누구든 현기증을 느끼는 법이다. 그가 떠난 첫해, 늘 우승 아니면 준우승을 차지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7위로 시즌을 마쳤다. 절대 강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여러 강팀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지금은 아무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중은 할지언정. 그렇다면, 위대했던 것은 팀인가 그 남자인가.
알렉스 퍼거슨의 자서전 《나의 꿈, 나의 인생》은 이 위대했던 감독의 자서전이다. 어린 시절부터 2000년까지의 생애가 자세하고 완벽하게 담겨있다. 그의 부모가 결혼 6개월 만에 자기를 낳았다는 고백부터 평생을 조선소 노동자로 살았던 아버지의 이야기, 공구제작 회사 견습공 생활을 하며 아마추어와 세미프로 선수로 살던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이야기(수원공고 출신 박지성도 기능공 자격증을 하나 취득했다), 축구선수로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캐나다 이민을 고민하던 이야기, 첫 아이의 출산을 지켜보다 기절했던 이야기, 그리고 그날 저녁 경기에 나서야 했던 이야기, 현역 은퇴 후 4년간 선술집(펍)을 운영하며 노동자 밀집지역의 분위기 험한 곳에서 바텐더로 살아간 이야기(취객들 간의 싸움으로 두개골이 부서지는 부상자가 나올 정도였다)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축구는 왜 세계인들을 매혹하는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자리한, 판타지 같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와 휴머니즘은 아름다운 감정이지만, 국가의 운영원리가 될 수는 없다. 인정에 호소해 나랏일을 처리하는 국가가 국제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생존을 지켜내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감정을 묻어두고 산다면 인류사가 비참해진다.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계산하며 처리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팍팍해질 터인가. 그래서 축구다.
축구 그 이상을 펼쳐내다
축구는 낭만주의와 휴머니즘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점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스포츠이자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전쟁터다. 하지만 피치 위에서의 모든 경쟁은 ‘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인간이 수행한다.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아름다운 감정, 충성심, 동료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길이 펼쳐진다. 냉정한 계산과 훈련, 정확한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위에 인간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심리적 요인이 첨가돼야 비로소 우승컵에 입 맞출 수 있는 곳이 축구의 세계다.
외국 유명 감독의 자서전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다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한국인들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성공’의 분야가 정치나 과학을 넘어 스포츠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만큼 사회가 다변화됐다는 증거다. 둘째 ‘국내적’ 시각을 벗어나 사회구성원들이 국제적 마인드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퍼거슨의 위대한 통찰이 페이지마다 고개를 내민다. ‘1군 자리를 보장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네가 경기장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팀에 계속 붙어있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충성심이 없어지면 어리석음이 지배한다’ ‘칼을 휘두르며 사는 자는 큰 망치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서로 존중하고 호감을 가진 사이라도 감독과 선수 관계는 복잡해질 수 있다. 팀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공유하지만 그들이 겪는 불안과 압력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가 불화의 씨앗이 된다. 감독이라면 반드시 집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책임한 행동은 모두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술의 습득은 반복연습에 달려 있다. 효과적인 연습은 습득하려는 기술을 반복해서 실시하는 것이다’ ‘충돌을 부르지 마라.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찾아온다’ ‘진정한 일류는 수준 높은 플레이로 다른 선수들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선수다’ 같은 명언이다.
선수들의 이적과 특정 경기 선수 기용에 대한 자세한 사후 증언은 역사의 의문을 풀고 진실에 다가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퍼거슨은 자신이 유소년 축구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거듭 강조한다. 그의 목표는 한두 시즌 반짝하고 사라지는 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팀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꿈꾸었다는 이야기다. 시간을 대하는 단위가 길고 장대했다는 뜻이다.
박지성 이야기는 없어
자서전에서 다루는 시기가 2000년까지인 탓에 박지성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대한민국호의 수장인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회고는 등장한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그때 그 시절 그 선수’의 모습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을 비교하는 재미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라이언 긱스는 소년 시절 어떤 선수였고 어떻게 퍼거슨의 눈에 뜨였는가.
찬란한 성취는 때로 누군가의 구체적 노력을 가린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노력을 한 끝에 그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를 정밀하게 증언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위대한 축구감독의 자서전을 넘어서는 인생지침서다. 축구를 넘어서서 인생 전체에 적용 가능한 고전(古典)이다. 점이 아니라 조그마한 사진을 활용해 거대한 모자이크로 만든 작품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각각의 사진은 그 자체가 거대한 이야기이고, 사진이 모여 만든 전체적인 이미지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이 책은 퍼거슨의 생애를 정밀하게 회고하는 모자이크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다. 2000년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께는 다른 책을 권한다. 2014년 문학사상사가 한국어판을 펴낸 또 다른 자서전 《알렉스 퍼거슨: 나의 이야기》다.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면, 자 이제 킥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