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17) 셰익스피어 사후 400주기 축제
셰익스피어 사후 (死後) 400주기 축제가 있었다. 옥스퍼드 근교의 소읍(小邑) 스트레드포드-어폰-에이븐의 홀리 트리니티교회 기록에 나오는 그의 사망일은 1616년 4월23일이다. 출생일과 사망일이 모두 4월 23일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출생일이 언제인지는 기록이 없고, 1564년 4월26일 유아영세를 받았다는 기록은 있다. 당시의 관례가 출생 후 3~4일만에 영세를 받는 것이었음을 감안하여 그의 생일을 4월22일이나 23일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셰익스피어의 출생일과 사망일이 같다는 이야기는, 신화성을 제고하기 위한 ‘근거있는’ 전설이다.시공을 넘나드는 인기 작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이자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는 지구 전역에서 지금도 널리 읽힐 뿐 아니라 공연으로 영화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심지어는 만화영화로도 재활용된다. 사후 4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꾸준한 흥행성적을 올린다는 건 그의 작품이 현대의 관객과도 아직도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해를 품은 달>에서 어린 연우가 몽환약을 먹고 가사(假死) 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모티프는 <로미오와 줄리엣> 마지막 장면의 창조적 차용이다. ‘숙부에 의한 부왕(父王)의 살해와 홀로 남겨진 왕자(王子)의 고난’은 <햄릿>의 줄거리인데, 이것을 어린이용으로 변환한 영화가 디즈니 만화 <라이온 킹>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아예 ‘이 영화는 배경만을 현대 뉴욕으로 바꾼 <로미오와 줄리엣>이다’라는 문장을 선전문구로 뽑았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함께 변한다. 그런데도 셰익스피어는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셰익스피어란 말인가?
셰익스피어가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시기는 대영제국의 팽창기와 정확히 겹치며, 영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셰익스피어 인기의 원천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해석은 극히 일부분의 진실만을 포함하고 뿐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은 유럽의 주요 국가가 아니었다. 우리가 한 때 ‘파리’애마나 ‘뉴욕’제과, ‘아리조나’ 카우보이와 ‘마카오’신사에 열광했던 것처럼, 시골문사이던 셰익스피어는 당대 선진국이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를 동경하여 수많은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 <오델로>), 베로나(<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가 대표적이다. 대영제국의 팽창기는 셰익스피어가 유럽의 독자들과 만나기 시작한 첫 번째 시대이다. 정치적 후광은 그가 만든 이야기가 영국 밖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을망정 그가 누리는 인기와 영향력의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보다는, 셰익스피어의 스토리 속에 시대와 문화권을 넘나들며 자체적으로 진화해나갈 단서들이 들어있다고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다.
최고의 번안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이야기는 희로애락같은 인간의 보편감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런 보편감정을 샘플링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모델이다. 이런 정제작업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창작의 천재라기보다는 번안의 천재다.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를 새로 꾸며낸 사람이 아니라, 당대에 가장 인기있고 널리 퍼진 설화들을 모은 뒤 그 스토리의 가장 극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새로운 질서로 재구축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복수(復)의 의지’를 다룬 <햄릿>의 공간적 배경은 덴마크 왕실인데, 이 이야기의 뼈대는 12세기의 덴마크 문필가 삭소가 펴낸 <덴마크사>에 고스란히 들어있고 이를 프랑스인 벨르포레가 번안하여 1570년 펴낸 <비극설화>에 확대 재생산된 형태로 남아있다.
셰익스피어가 <비극설화>를 읽은 것은 거의 확실하다. 토머스 키드의 희곡 <스페인의 비극>도 문제다. 이 작품을 공연할 때 셰익스피어는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햄릿>의 가장 극적인 요소인 복수, 광기, 극중극, 망령의 등장 등은 본디 토머스 키드의 아이디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순수창작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비극적 로맨스소설은 셰익스피어 당대에 각기 다른 영역본이 널리 돌아다닐 만큼 인기 출판물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소설의 극적인 부분만을 모은 뒤 자신만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거의 모든 작품이 이러한 뒷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매력적 캐릭터로 재창조
그는 역사서, 야담집, 하이틴 로맨스 소설,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 등 듣고 모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끌어 모은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성과와 성취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오래 살아남은 인기있는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인간의 보편감정을 직격(直擊)하는 맛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셰익스피어가 남의 아이디어를 무작정 가져다 쓴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각각의 등장인물을 생동감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창조하고, 이야기의 얼개를 다층적 논리적으로 재구성하여 극적인 요소를 증폭한 것은 오롯이 그의 공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끈질긴 생명력의 본질은 바로 ‘혼합과 흡수’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모든 이야기들은 여러 이야기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이라는 과정을 거쳐 진화한 결과물이며, 이 결정들이 천재의 손을 거쳐 다시 한 번 서로 섞이고 부딪히면서 시대와 문화권을 뛰어넘을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진 것은 혹시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