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4)
(13)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천년 왕국 신라도 8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혜공왕이 피살되던 시점부터 150여년 동안 무려 왕이 20명이나 교체되는 등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지요. 진골 귀족들은 서로 왕이 되겠다고 끊임없이 다투기 바빴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방 통치도 허술해져 반란이 터지거나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겹쳐 하루하루 살기 힘들었던 농민들이 도적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9세기 말 진성여왕 때 원종과 애노의 난이 대표적이며, 붉은 바지를 입어 ‘적고적’이라 불린 도적들이 경주 근처까지 나타나는 일도 생겼습니다.(13)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무너져가는 천년 왕국 신라, 인재를 놓치다
그렇다면 신라의 국력이 쇠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막아보려 했던 이들은 없었을까요? 물론 분명히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통일 직후 왕권을 뒷받침했던 육두품 세력들이 이때에도 있었지요. 대표적으로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올렸던 최치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의 개혁안을 실현시키지 못합니다. 진골 귀족들의 견제와 반대가 노골적이었지요. 그래서 최치원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할 수밖에 없었지요. 반면 또 다른 육두품 출신의 일부는 반신라 세력으로 돌아서 자신을 알아줄 주군을 찾게 됩니다. 최승우와 최언위 등이 바로 그런 인물이지요.
한편, 당시 신라의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가운데 지방에서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며, 스스로를 성주와 장군이라 일컫는 호족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건국한 견훤과 궁예입니다. 견훤은 신라의 하급 군인 출신으로, 세력을 규합해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뒤에 여러 호족에게서 지원을 받아 마침내 900년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궁예는 강원도 호족 양길의 부하로 출발했는데, 힘을 키워 강원도와 경기도는 물론 황해도 지역까지 차지한 뒤 901년 송악(개성)에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견훤과 궁예는 인재들을 불러모아 세상을 바꾸려 합니다. 여기에 호응해 많은 인물이 모여드는데, 앞서 언급한 육두품 출신의 최승우가 후백제로 들어가 견훤의 지략가로 활약하게 되지요.
변방의 인물 왕건, 세상을 얻다
궁예에게는 아지태, 종간, 최응 등의 책사와 함께 왕건이라는 20대 초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당시 신라 변방인 송악의 일개 성주 자식으로 무명의 인물이었지요. 그는 22세 때부터 궁예의 장수로 활약하게 되는데요. 흥미롭게도 육군이 아니라 수군을 거느리고 후백제의 배후인 전남 나주를 공략합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당시 견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서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는 주변 사람들을 믿지 않고 자칭 미륵이라 하며 오로지 자신만을 내세우는 폭압적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대는 우후죽순처럼 자란 각 지역의 호족들과 인재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 리더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궁예는 전형적인 구시대 인물이었지요. 한 예로 궁예는 왕건이 모반을 꾀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다고 추궁합니다. 왕건은 억울한 나머지 곧바로 부인하려 합니다. 그러자 책사 최응이 일부러 자신의 붓을 떨어뜨립니다. 붓을 줍는 척하며 왕건에게 이를 인정할 것을 권합니다. 왕건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거짓 자백을 하지요. 궁예는 자신이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며 왕건을 놓아줍니다. 궁예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었으며, 왕건은 주변 사람의 말을 포용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인재를 포용하고, 지방 호족을 통합
918년 결국 왕건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합니다. 그리고 견훤과 자웅을 겨루는 운명의 전투를 시작하지요. 왕건은 전투 초반에 견훤의 기세에 밀려 공산 전투에서 포위당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합니다. 그때 궁예를 몰아내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신숭겸이 목숨을 바쳐 그를 구해냄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그 후 왕건은 930년 고창군(경북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무찌르며 기세를 역전시키게 됩니다. 견훤은 자신의 후계자를 둘러싼 내분에 휘말려 오히려 장남이었던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합니다. 또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가 왕건에게 귀순하게 되고, 왕건이 후백제의 새 왕 신검을 물리치면서 이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왕건은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낮추고 흑창이라는 빈민 구제 기관을 만드는 등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매진합니다. 또한 육두품 출신이었던 최언위 등의 도움을 받아 유교적 통치 체제를 만들어 나가기도 하지요.
왕건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줄 아는 리더십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의지와 포용력으로 이제 495년 동안 유지되는 고려 사회가 순조롭게 출발하게 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