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들고나온 세제 개혁안이 워싱턴 정가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부유층과 기업에 추가적 세금을 물려 중산층의 복지와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오바마 정부의 ‘중산층 경제론(Middle Class Economics)’이 지난 2일 의회에 제출된 2016회계연도(2015년 10월1일~2016년 9월30일) 예산안을 통해 구체화됐기 때문이다. 부유층과 기업의 해외 보유금에 추가적 세금을 물리는 것을 골자로 한 예산안이 발표되자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은 즉각 반발했다. 오바마 정권이 추진하려는 증세 정책이 작은 정부를 표방하는 공화당의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뉴스] 오바마의 '부자 증세'…워싱턴 정가의 '뜨거운 감자'로
‘부자 증세’로 중산층 퍼주기

오바마 정부가 제시한 예산안의 규모는 3조9900억달러(약 4400조원)에 달한다. 노인층 무료 의료보험인 메디케어와 사회보장연금 등 연방 정부의 의무지출을 제외한 일반예산을 기준으로 하면 올해보다 7% 늘어났다. 2011년 양당이 합의했던 ‘정부지출 자동 삭감(시퀘스터)’ 한도를 740억달러 초과하는 수치다. 시퀘스터는 10여년간의 대테러전과 경제위기 회복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커지자 양당이 재정적자 감축폭을 합의하지 못하면 연방정부 예산이 자동삭감되게 한 조치다.

예산안의 핵심은 부유층과 기업의 세금을 올려 그 돈으로 중산층을 지원하고 도로 항만 등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확대해 경제 성장의 기반을 확충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부부 합산 연소득 50만달러 이상 고소득자의 자본이득세율을 현행 23.8%에서 28%로 올리고 100여개의 거대 은행에 대한 은행세를 신설하기로 했다. 소득 상위 1%를 겨냥한 이른바 ‘부자 증세’다. 백악관은 부자증세 정책으로 향후 10년간 3200억달러의 세수가 추가로 걷힐 것으로 추정했다. 이 가운데 2350억달러를 중산층 지원에 사용할 계획이다.

기업의 해외 유보금 과세 역시 오바마 대통령의 중산층 경제론을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이다. 오바마 정부는 법인세를 35%에서 28%로 낮추는 대신 기업의 해외 수익에 19%를 과세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해외 보유금에 대해선 14%의 일회성 과세 방안을 제시했다. 법인세 부담으로 해외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애플 등 대기업의 자금을 미국 본토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다.

큰정부 VS 작은정부

전문가들은 이번 예산안이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승부수라고 분석한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에 빼앗긴 후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을 우려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중산층·저소득층의 지지를 이끌어 내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설명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미국 경제 개선으로 지지율 50% 선을 돌파한 오바마 대통령의 자신감이 반영된 예산안”이라며 “공화당이 장악된 의회에서 원안대로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예산안은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민주당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공화당은 오바마의 개혁안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 세출위원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경제에서 잘하는 부문을 착취하는 ‘질투의 경제’에 매달리고 있다”며 “정치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국가경제에는 도움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 예산안이 겉으로만 서민·중산층을 위한 것일 뿐 토목업자를 위한 예산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로 철도 교량 등 인프라 건설에 6년간 4780억달러를 배정한 것에 경제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중과세 금지 원칙 위반 우려도

아일랜드 영국 룩셈부르크 등 유럽 국가들도 오바마의 예산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마찬가지다. 스타벅스 등 다수의 대기업이 낮은 법인세율 때문에 해외 유보금을 유럽 국가에 쌓아 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은 미국보다 20%포인트 이상 낮은 12.5%에 불과하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오바마 대통령의 예산안은 조세회피처를 이용해 어떠한 정부에서도 과세 받지 않은 소득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장점이 있다”며 “하지만 애플 화이자 등 미 대기업의 해외 유보금이 모두 조세회피처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해외 유보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미 다른 정부에 의해 법인세를 부과받았다는 것이다.

FT는 이어 “다른 정부에 이미 법인세를 부과한 소득에 대해 14%의 추가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모든 소득에 한 번만 과세하는 ‘이중과세금지 원칙’에 어긋난다”며 “기업들이 해외에 이익을 쌓아놓는 원인은 비효율적이고 불공정한 미국의 법인세 체계에 있다”고 분석했다.

김순신 한국경제신문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