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6)
(4) 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7)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9) 실크로드의 끝에 신라가 있다
(4) 하늘과 인간 연결해주는 솟대신앙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7)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美
(8) 일본 열도로 건너간 백제 문화
(9) 실크로드의 끝에 신라가 있다
![고구려 부뚜막](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60488.1.jpg)
뛰어난 외교술로 고구려 최전성기를 누리다
![고구려 시루와 솥](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60497.1.jpg)
즉, 이 대립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광개토태왕이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요동 지역을 확보하고 만주 대부분을 차지했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중국 북조와 남조 모두 고구려가 계속해서 부담이 되므로 차라리 먼저 쳐서 없애야 후환이 생기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때 장수왕은 먼저 상대방을 안심시키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성 백제를 무너뜨린 장수왕
![고구려비](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62954.1.jpg)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깁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의미가 담겨 있었는데요. 첫째, 기존 국내성의 귀족 세력을 확실하게 누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한다는 것이지요. 그 압박은 대단하여 곧 백제와 신라가 위협을 느낀 나머지 ‘나제동맹’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고구려의 막강한 기세를 꺾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장수왕은 454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갑니다. 475년에는 직접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백제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였으며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그 전에 백제 개로왕은 다급하게 중국 북위에 국서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고구려와 쌓은 돈독한 외교 관계를 생각하여 단칼에 거절합니다. 결국 개로왕은 한강 유역의 아차산성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살아남은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훗날을 기약하며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한편 장수왕은 계속 신라마저 압박하여 더욱 고구려의 영토를 늘리게 됩니다.
반격의 서막, 나제 동맹이 추진되다
![[한국사 공부]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52022.1.jpg)
이 외에도 오늘날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 터 주변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부뚜막이나 시루와 솥 등이 발견되었어요. 백제 입장에서는 원통한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로 답사를 가지 않더라도 고구려인의 흔적을 충분히 직접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을 통해 최전성기를 이룬 고구려가 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을까?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장수왕 앞에서 힘도 못 쓰던 ‘나제동맹’이 오히려 이때를 계기로 역설적으로 더욱 단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닐까라고 봅니다. 그리고 6세기에 이 나제동맹을 적극 활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는 주인공은 놀랍게도 백제가 아닌 신라가 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