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생글 논술경시대회 - 고3 인문 문제·해제 공개
[생글 논술경시대회] 숨기고 싶은 과거 규명…역사에 대한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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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제시문 (가)~(마)는 과거사 청산방식에 대한 글입니다.

(가)
‘과거청산’이란 잘못된 과거사를 정리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엄격히 말해 과거 혹은 역사와 관련해 ‘청산’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역사적 사실인 과거사 자체를 사후(事後)에 마치 없었던 것처럼 하거나, 처벌과 보상 등의 방법으로 온전하게 교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반화되어 익숙해진 이 용어를 굳이 회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그 개념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

과거청산의 의미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과거 규명’이다. 이는 은폐·축소·왜곡 또는 금기시된 과거사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시행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과거 규명은 사건의 진상과 아울러 이에 대한 책임의 규명, 가해자의 처벌, 피해자의 보상과 복권, 명예 회복 등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사법적 또는 정치적 측면에서의 과거청산인 셈이다.

과거청산의 또 다른 의미는 ‘과거 성찰’이다. 과거 성찰은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의 차원을 넘어 그에 대한 비판과 반성, 애도와 치유의 노력을 의미한다. 과거 성찰의 측면에서 보면 과거청산은 단순히 죄와 벌, 처벌 및 보상과 관련된 사법적 혹은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식과 역사인식, 가치와 윤리, 문학과 예술의 문제이자 동시에 기념일, 기념물 등 공식, 비공식적 기억과 기념 문화의 문제이다. 아울러 과거 성찰의 측면에서 보면 과거 청산은 단지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서 과거사에 직접 연루된 특정 당사자 개인이나 일부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국가나 한 사회 구성원 전부, 나아가 후속 세대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 프랑스의 과거청산에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과거’는 정확히 언제를 가리키는가? 1940~1944년의 ‘독일 강점기’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공식적으로는 ‘휴전협정’체결)하면서 시작되어 1944년 8월 25일 파리 해방으로 끝난 4년간이다. 프랑스인들은 이 시기를 무엇보다도 ‘암울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수도 파리를 포함한 국토의 절반 이상(1942년 11월부터는 전체)이 독일 군대에 점령당했고,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인질이나 레지스탕스 대원으로서 총살당했으며, 유대인, 레지스탕스 활동가, 공산주의자 등 13만9천 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그 가운데 7만 8천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65만 명의 노동자가 독일의 공장으로 끌려가 일해야 했다. (중략)

프랑스의 나치협력자(대독협력자) 청산은 1944년 6월 26일 드골이 전국에 ‘협력자 재판소’를 설치하고, 이어 8월 28일 국치죄를 저지른 자들의 사회활동을 금지할 목적으로 ‘시민 재판부’를 설치하면서 본격 시작됐다. 앞서 대독 항쟁 기간 중이나 해방과정에서도 약식 처형 형태의 협력자 처단은 더러 있었다. 이는 주로 레지스탕스 조직이 즉석에서 조직한 비상군법회의 형식의 재판인데 ‘거리의 정의’로 불린 이 재판에서 8000~1만 명이 처형되었다.

나치협력자 재판은 협력자 재판소, ‘비국민 판정’을 담당한 시민재판부, 그리고 비시정부*의 고위책임자 처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고등협력자재판소 등 세 군데서 진행됐다. 1944년 하반기부터 1948년 12월 31일까지 협력자 재판소에서 취급한 재판 건수는 총 5만5331건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676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767명은 처형되었다. 또 무기징역 2702명, 유기징역 1만9637명, 금고 2만4927명 등 4만 명 가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3578명이 공민권 박탈을 당했다.

이와 별도로 시민재판부에서는 총 6만9282건을 취급하였는데 이 가운데 4만6645명이 공민권 박탈을 당했다. 또 고등협력자 재판소에서는 페탱 원수와 라발 총리 등 비시정부의 최고위층 인사 108명에 대한 재판을 벌여 사형 18명, 징역 및 금고형 22명, 시민권 박탈 15명 등의 판결을 내렸다. 사형선고를 받은 페탱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라발과 민병대장 출신의 다르낭 등은 처형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형사처벌 이외에 별도로 사회활동을 제한하거나 징계를 가하기도 했다. 우선 친독협력 문인들에게는 작품발표 금지령을 내렸으며, 나치에 협력한 공무원들에게는 징계를, 또 친비시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에서 쫓겨났다. 또 독일군 점령 지역에서 15일 이상 발행된 신문사는 모두 ‘유죄’로 규정해 폐간시켰으며, 나치협력 언론사의 경영자를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화했다. 또 비시정부에 복무했던 공무원 150만 명 가운데 2만2000~2만8000명이 행정 숙청의 대상이 돼 해임이나 파면 등 각종 징계를 받았다. 이 외에도 부당이득몰수위원회와 업종 간 연합숙청위원회가 부문별로 구성돼 친독 기업주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상대로 경제적 숙청을 단행하기도 했다. (중략)

해방 후 프랑스의 숙청은, 한 차례 대규모의 사법처벌 물결을 통해 대독협력 행위를 확실히 범죄로 규정하고, 해방 전후의 내전과 무질서를 종식시켰다.

* 1940년 6월 나치스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 오베르뉴의 온천도시 비시에 주재한 프랑스의 친(親)독일정부

(다)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의 정치성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다.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한다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서 살아 있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 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다. 사법적 심판이 아무리 추상같다고 해도, 과거를 망각하는 한 불행한 과거는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사법적 처단처럼 카타르시스는 제공해 줄 수 없지만 과거에 대한 뼈아픈 기억과 성찰은 법적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역사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다. 1945년 11월 개정해 총 403회에 걸쳐 24명의 나치 전범을 심판한

른베르크 재판은 주요 전범들에게 사형, 종신형, 금고형을 각각 선고함으로써 평화와 인류에 대한 범죄를 묻고 사법적 정의를 실현했다. 뿐만 아니라 점령 당국의 주관 아래 전범 처벌을 위한 국내법을 제정해 각 주정부별로 나치 범죄자와 지지자에 대한 재판을 열어 금고형, 공민권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나치의 과거를 법적으로 단죄했다. (중략)

정작 무서운 것은 ‘침묵의 공모’이다. 나치 전범에 대한 상대적으로 철저한 사법적 심판은 사법 심사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의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계기였다.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아이히만의 사형에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아이히만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지만 아이히만의 처형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죄의식을 덜어줄까 우려한 것이다. 부버의 우려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다. 1951년 서독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히틀러 집권 이후 2차대전 발발까지가 독일이 가장 잘 돌아가는 시대였다고 과반수의 평범한 독일인들이 답했다. 그들은 소수의 전범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움으로써 나치의 역사적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받은 셈이다. 이 역설은 도쿄 재판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28명의 전범에게 역사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움으로써, 전쟁과 총력전 체제를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면죄부를 부여받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나치 과거의 청산과 극복이라는 문제는 사법적 차원에서 죄의 유무를 추궁한다는 범주를 넘어서, 그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죄의식과 수치심을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드러나는 범죄는 아니지만 일종의 공동의 책임감이라는 도덕적 죄의식이 독일인들의 전통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촉구한 카를 야스퍼스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라) 스페인에서는 1936~1939년 내전기간 동안 수십만 명이 좌파와 우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희생되었으며,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집권 초기에도 학살·테러·고문·추방 등의 비인도적 행위가 대량으로 자행됐다. 이처럼 스페인은 내전과 독재 시기 동안 불법과 폭력에 의해 엄청난 희생이 발생했지만 스페인의 과거사 처리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였다. 스페인은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 사면법을 제정해 고문·테러·학살 행위를 포함하여 내전 및 독재시기에 좌익과 우익 세력이 행한 모든 불법·폭력 행위에 대해 일대 사면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1977년에 제정된 이 사면법은 프랑코 사후 민주화를 향한 이행의 시기에 구체제 중심이었던 군부 및 보수우익 세력과 사회노동당 중심의 좌익 세력 사이에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소산이다. 흔히 ‘망각협정’이라 불리는 이 사면법은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 과거의 범법 행위를 규명하고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사면하고 덮어버림으로써 과거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망각협정’에 의한 스페인의 과거청산 방식을 부정 일변도로 평가할 수 없는 면도 있다. (중략) 내전기에는 좌·우익 상호 간에 가해와 보복이 이어졌고, 따라서 좌·우 할 것 없이 책임이 있으며, 그런 과거사를 재론하는 것은 그동안 아문 상처를 건드리고, 잊고 싶은 참상을 다시 떠올리는 것일 뿐이라는 태도가 지배적이다. 또 정치적 억압과 급속한 경제발전이 병행된 독재시기에 대해서는 그 공과를 아울러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독재자가 사라진 뒤 과거 청산 과제에 당면한 스페인 사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한 과거사를 들춰 시비를 가림으로써 다시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기보다는 상호 간에 관용과 화해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불행한 과거를 잊기로 한 것이다. (중략)

사실 진정한 과거 청산은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스페인의 경우처럼 과거의 질곡과 족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현명하고 지혜로운 결정일 수도 있다. 어떤 부작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과거사는 들춰내야 한다는 ‘청산지상주의자’나 과거사 규명을 관용과 화해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맹목적 청산론자’가 아니라면 스페인의 사례에는 나름대로 음미할 만한 점이 있다.

(마) 친일인명사전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1994년부터 진행해 온 사전편찬 작업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찬양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의 목록을 분류·정리하여 2009년 11월8일 출간한 인명사전이다. 총 3권, 3000여쪽에 달하는 친일인명사전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1945년 8월15일 해방될 때까지 일제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주요 친일 행각과 광복 이후 행적 등을 담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 2004년 2월24일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 최용규 의원이 여야 의원 169명의 명의로 발의하고 그해 12월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특별법이다. 이 법은 이듬해 2005년 3월22일 법률 제 7203호로 공포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2006년 7월13일 대통령 직속으로 4년 임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재산조사위원회가 귀속(환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러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의 친일 행위로 축재된 재산으로, 제3자가 선의의 목적으로 취득했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경우에는 예외로 취급하였다. 위원회가 4년간 조사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모두 168명이었고 환수한 토지는 2359필지(1113만9645㎡)로 이는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해당하는데 공시지가로는 959억원, 시가로는 2106억원에 달한다.

[문제 1] 제시문 (가)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시문 (나)와 (다)의 내용을 비교하시오. (800자 내외)

[문제 2] 제시문 (라)의 입장에서 (마)의 친일청산방안을 어떻게 평가할지 쓰고, (나)와 (다)를 모두 활용하여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과거사 청산 방식에 대해 기술하시오. (10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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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답안

[문제 1] 예시답안


제시문 (가)의 역사 청산 방식은 규명과 성찰로 이원화돼 있다. 규명은 주지하다시피 역사적 진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그 진상의 주범들에 대한 정치적, 사법적 단죄의 형국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과거사는 금기와 왜곡의 국면을 다분히 강제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 반면 성찰은 말 그대로 역사적 과오에 대한 자기반성의 성격을 띠는 바, 이때 ‘자기’는 전 시간을 아우르는 역사적 주체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단죄의 성격보다는 역사적 주체의 공동책임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과오에 대한 미래지향적 반성을 도모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대립되는 양쪽의 입장은 제시문 (나)와 (다)가 각각 구체적으로 예시해주고 있다.

제시문 (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는 대독 협력 행위자에 대한 전방위적 숙청을 통해 오욕의 과거사를 단죄했다. 철저한 사법적 처벌의 형태로 이루어진 그 청산 행위는 전체 나치 협력자들의 대표자들에 대한 선별적 처벌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며, 그런 정치적 단죄의 국면 속에서 실제 있었던 다수의 과오는 슬며시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에 대한 비판적 설명이 제시문 (다)에 나와 있다. 이른바 ‘침묵의 공모’라는 것이 그것인데, 전범에 대한 대표적 처벌이 대다수의 나치 동조자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반성의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가)의 성찰이 지니는 의미 역시 이 같은 상황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며, 대중 전체의 역사적 책임이 그 집단의 미래적 역사를 결정짓는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07자)

[문제 2] 예시 답안

제시문 (라)에 설명된 바와 같이 스페인의 역사 청산 방식은 망각에의 합의로 정의할 수 있다. 내전 시기의 상호간 죄과를 들춰내서 단죄하지 않고 모두 잊은 채 미래를 도모하자는 것이 스페인의 결정이었다. 과거사의 사법적·정치적 단죄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 갈등을 조장할 수 있으며 현실적 국면에서 일정한 사회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더불어 역사에 대한 처리는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실천을 그것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스페인의 선택은 전적으로 미래를 향해 있었다는 점에서 현명한 부분이 있다.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마)의 친일청산 방식은 미래보다는 과거사의 철저한 단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친일파들의 강제적 재산 몰수를 통해 우리나라는 친일행위자에 대한 공적 처벌을 단행했는데, 이는 친일행위 자체에 대한 어떤 현명한 처신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제시문 (나)의 프랑스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프랑스의 대대적인 단죄와 숙청은 분명 사회 전체에 정치적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처벌의 대상이 정확이 선별되었을까 하는 의심과 불신에 있다. 우리도 프랑스도 결국 대표성을 통해 죄를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적과 동조했을 대다수의 국민에게 역사적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어떤 비겁한 안도감과 의도적 망각이 똬리를 틀게 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가 주장하는 수치심과 죄의식의 자각과 드러냄도 말처럼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아픈 기억의 공론화가 어떤 사회적 병리 현상을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야기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을 말해버리고 마는 것이 커다란 관용과 화해의 품에 기억을 껴안는 것보다 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수의 수치심을 미래지향적 용서와 침묵으로 지그시 누르고 보다 넓고 먼 차원을 내다보는 역사적 정리 방식은, 사회적 손실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도 (라)의 스페인의 경우처럼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것이다.(1026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