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35) 버냉키의 고백과 중앙銀의 통화 정책

정치과정서 만들어진 중앙은행의 통화정책…태생적인 한계 가져

"Fed의 긴축정책이 되살릴 수 있었던 침체국면…대공황 늪에 빠지게 했다"
버냉키, 양적완화 정책에도 금융위기 여전히 진행형
[세계 경제사] 통화안정 '평형수' 역할해야 할 중앙銀…정치권력 '과적' 위험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2002년 11월밀턴 프리드먼의 90회 생일 기념 콘퍼런스에서 벤 버냉키는 “당신들(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이 옳았고 우리(중앙은행)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미국 중앙은행(Fed) 이사였던 그는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Fed의 긴축적 통화정책이 되살릴 수도 있었던 경기침체 국면을 대공황의 늪으로 몰아넣었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2006년 Fed 의장이 된 버냉키는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자신의 공언대로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연방기금 금리를 제로(0)로 떨어뜨리고 수차례의 양적완화를 통해 수조 달러를 풀었다. 그러나 Fed 의장으로서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 천문학적인 달러를 풀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수행 능력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전 필자들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은행제도는 시장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정치권력에 매우 취약하며,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데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통화정책은 화폐 수요에 맞게 화폐를 공급하는 일이다. 그래야 화폐가치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화폐가치가 안정돼야 하는 까닭은 시장의 원활한 작동과 경제안정을 위해서다. 시장경제는 가격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 가격 시스템이 왜곡되면 시장이 왜곡돼 많은 경제 혼란과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이 일어난다. 가격을 규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화폐가치 불안정은 가격규제와 비슷한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화폐로 표시되기 때문에 화폐가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가격 시스템에 왜곡이 생기고, 그로 인해 시장이 왜곡되고 경제의 안정성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화폐가치 불안정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특정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을 규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특정 재화에 대한 가격규제는 그 분야에 중점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화폐가치 불안정은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통화팽창으로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지면 사람들은 자기가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대가로 주는 화폐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통화팽창은 화폐가치를 불안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대가격을 왜곡시킨다. 통화팽창의 파급 경로는 일률적이 아니라 비대칭적이어서 어떤 재화의 가격은 크게 상승하고, 어떤 재화의 가격은 작게 상승한다. 이런 상대가격의 왜곡은 구성원들의 소득과 부의 격차를 일으킨다. 또한 시장참가자들의 경제적 계산을 왜곡시켜 시장과정을 방해한다. 따라서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화폐가치 안정이 필수다.

중앙은행제도하에서 화폐가치가 매우 불안정해졌다. 중앙은행제도가 도입되고 1970년대까지는 중앙은행의 성과가 나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금본위나 은본위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규율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외부 통제가 사라지자 중앙은행의 성과는 매우 나빠졌다. 실제로 2003년 102개국의 화폐가치를 연구한 랜달 크로즈너 시카고대 교수(‘디지털 시대의 통화 경쟁’ 케임브리지대출판부)에 따르면 1972년 이후 50% 이상 구매력을 유지한 국가는 하나도 없다.

중앙은행제도하에서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지고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중앙은행이 정치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부 지출을 늘리기 위해 정부는 세금 인상보다는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통화팽창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는 유인을 갖고 있다. 재정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하기 위해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정부의 채권을 매입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채권을 매입하면 통화가 팽창되기 때문에 이런 정부의 압력은 화폐 수요 변화와 관계없이 화폐 공급이 이뤄지도록 해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지고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중앙은행의 독립성 확보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은 정치적 압력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갖고 있는 국가의 화폐가치가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독립성이 매우 강했던 과거 독일의 분데스방크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확보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앙은행은 화폐 수요의 변화에 맞게 화폐를 공급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화폐 수요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정보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중앙은행 시스템에서는 화폐불균형 문제가 상존할 수밖에 없다.

화폐 공급이 화폐 수요의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이뤄져 화폐균형이 일어나는 제도는 자유금융의 민간화폐제도다. 민간화폐제도는 민간은행에 의해 화폐가 경쟁적으로 발행되는 화폐금융제도다(‘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31)’ 참조). 자유금융의 민간화폐제도는 성공적으로 실시됐던 역사적 경험도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민간화폐제도는 사실상 실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민간화폐제도가 실행되기 어렵다면 현 중앙은행체제에서 화폐가치 안정과 경제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준칙에 의한 통화정책이다. 프리드먼이 제안한 것도 준칙에 의한 통화 공급이었지 헬리콥터로 돈을 마구 뿌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