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31) 민간화폐의 발전과 쇠락

1837~1863년 美 자유은행시대, 은행마다 화폐 만들어 유통
"불량 화폐 늘어 시장 혼란" 美 정부, 화폐발행 독점
자유은행 유지한 캐나다보다 예금손실률 높아지고 불안 커져
[세계경제사] 민간화폐 발행 막아 금융안정?…대규모 뱅크런 불러왔다
[세계경제사] 민간화폐 발행 막아 금융안정?…대규모 뱅크런 불러왔다
현대 경제에서 화폐의 발행과 공급은 정부 독점으로 이뤄진다.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독점적인 화폐 발행과 공급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중앙은행이 경기 진작 혹은 물가 안정을 명분으로 통화 공급량을 조절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화폐의 발행과 공급을 정부가 독점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민간과 국가의 화폐 발행은 상당 기간 공존했다. 금화나 은화와 같은 주화의 주조는 민간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졌으나 정부가 화폐제도에 직접 개입해 화폐 주조를 국가 독점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정부는 화폐 주조를 독점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금속 주화의 경우 정부 독점은 무게와 순도의 변조를 가능하게 해 세금을 걷지 않고도 정부로 하여금 재원을 조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화(正貨·specie)의 주조는 정부가 독점하더라도 상업은행에 대한 규제나 개입이 없었던 경우에는 은행들이 은행권을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었고 은행권의 자유로운 발행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간에 의한 화폐 발행 및 공급이라고 할 수 있다.

상업은행에 의한 화폐 발행이 나타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경제 규모 확대에 따라 주화 사용의 거래비용이 증가한 데에 있다. 또 다른 원인은 정부 주조 화폐의 문제점 때문이었다. 정부가 시뇨리지(화폐발행 차액)를 얻기 위해 주조 변조를 일삼는 주화 대신에 은행들이 발행하는 은행권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민간의 자유로운 화폐 발행이 가져온 영향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혼란과 무질서, 반복적인 은행 위기와 공황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반면 효율적인 통화시스템으로 안전하고 널리 통용되는 교환의 매개수단을 제공했던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중앙은행(Fed)이 성립된 것이 1913년이고 국가은행법 제정으로 은행이 연방정부의 인가와 감독을 받게 된 것은 1863년이다. 1863년 이전까지 민간은행의 화폐 발행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이 시기를 '자유은행시대'라고 한다. 19세기 캐나다와 스코틀랜드도 미국의 자유은행시대와 유사하게 은행들이 은행권의 형태로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미국의 자유은행시대에 나타났던 은행 위기와 금융시장의 혼란은 이후 민간 화폐 발행 금지, 은행에 대한 규제의 근거가 됐다.

자유은행시대와 같이 은행에 의한 민간 화폐 발행이 경쟁적으로 이뤄졌던 시기에 대한 평가는 먼저 민간 화폐가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저품질의 재화만 거래된다는 소위 ‘레몬’ 문제로 귀결되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당시 나타났던 은행 위기와 금융시장 혼란의 원인이 은행의 자유경쟁에 내재한 불안정에 의한 것인지 여부도 민간 화폐 발행 시기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된다. 변조가 가능한 주화와 달리 은행권의 ‘레몬’ 문제는 시장에서의 경쟁이 은행권의 가치 하락과 부도로 귀결되느냐의 문제이다. 자유은행시대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당시 발행된 은행권들이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나타났다 곧 사라지는 소위 ‘들고양이 은행들(wildcats banks)’이 횡행해 대규모로 유통되다 대부분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는 은행권이 남발됐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옳다면 자유은행시대에 발행된 민간 화폐 시장은 전형적인 ‘레몬’ 문제가 나타난 시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은행시대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이 시기에 대한 연구결과,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미국의 자유은행시대(1837~1863) 자료에 따르면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의 가치는 일부를 제외하고 액면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와 같은 기록은 자료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은행들의 자발적인 은행권 교환 네트워크인 서포크 시스템 하에서 발행·유통된 은행권들도 액면가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관련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그럼 자유은행시대에 은행권의 '레몬'문제가 일어났을까요?) 따라서 자유은행시대에 은행들에 의해 발행·유통된 민간 화폐에서 ‘레몬’의 문제가 나타났다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미국은 1863년 국가은행법 제정과 함께 민간 화폐 발행이 금지되고 은행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다. 이와 같은 '국가은행시대'는 Fed가 성립된 1913년까지 이어졌다. 같은 시기 캐나다는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은행이 자유롭게 민간 화폐인 은행권을 발행했고 은행에 대한 여타 규제도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데 민간 화폐 발행이 금지되고 은행 규제가 강했던 미국에 비해 캐나다 은행들이 예금자 손실, 은행 실패 등이 훨씬 적었다. 당시 평균 은행 예금자 손실 비율은 미국이 캐나다에 비해 60% 높았고, 캐나다의 경우 은행들 간 자발적인 협조로 은행 패닉의 확산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금융위기 혼란이 미국보다 현저하게 적었다. 반면에 자유은행시대의 ‘들고양이 은행’과 같이 화폐 발행과 은행업에서의 자유경쟁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민간 화폐 발행을 금지하고 은행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던 미국의 국가은행시대는 오히려 광범위한 뱅크런과 은행 실패를 경험한다.

19세기 미국 역사를 보면 은행업과 화폐 발행에서의 민간의 자유경쟁이 불안정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레몬’ 문제를 발생시키고 광범위한 은행 실패와 예금자 손실을 가져온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서포크 시스템이나 캐나다의 경험에서 보듯이 은행들 간의 자발적인 은행권 교환 네트워크 및 청산소 구축으로 은행에서 발행한 민간 화폐의 가치가 안정됐고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은행 실패와 위기도 그 원인을 자유로운 경쟁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미국에서는 은행권의 자유로운 발행이 금지됐고 은행에 대한 규제는 1913년 Fed 설립,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됐다.

송원근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