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1897~1910)은 근대국가였는가? 이 질문은 근대국가(modern state)의 기준이 없다면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서구에서는 16세기부터 영주들이 서로 경쟁하던 분권적인 정치체제가 퇴조하고 강력해진 국왕이 전국을 통치하는 절대주의 체제로 변화했다. 이것을 근거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근대국가 성립의 기준으로 삼으면 중국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부터 근대국가였다(F 후쿠야마 『정치질서의 기원』).
좀 더 엄격하게 영국에서 명예혁명(1688년)으로 입헌군주제가 수립된 것을 근대국가의 기준으로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의적인 왕권의 남용을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 영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중요한 제도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프랑스혁명(1789년)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서구 역사에서 나온 ‘근대’라는 개념을 다른 세계의 역사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까?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서 ‘근대국가’를 정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근대국가의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져 일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근대국가의 기준이라면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근대국가를 수립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국왕이 전국을 군현제에 의해 직접 통치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정치체제가 서구 근대국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개항 후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분권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후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부터 만들어야 했다(廢藩置縣, 1871).
그러나 입헌군주제에 의한 왕권의 제한이 기준이라면 조선왕조는 물론이고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1899년 8월 반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이 전제군주국임을 너무나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군주가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만대불변하는 “전제정치”이기 때문에 군사, 법률, 행정, 외교와 관련된 일체의 국정이 오로지 군주 한 사람에게만 집중돼 있었다. 무엇보다 군주에게만 법률을 제정할 권리가 부여됐으며 “무한한 군권”을 “침손”하는 일체의 행위는 “신민의 도리”를 잃은 것으로 처벌 대상이 됐다.
왕권제한측면에선 근대국가 아님
이런 전제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 직속의 원수부(元帥府)가 중앙과 지방의 군부대를 지휘 감독하도록 했으며(사진), 궁내부에 경위원(警衛院)이 설치돼 서울(皇城) 내외와 개항장의 치안을 담당하고 ‘수상한 범죄자’를 감시 체포하도록 했다. 또한 국사법이나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재판에 회부된 죄인은 단심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심지어 화폐를 발행하는 전환국도 국왕 직속기관이 됐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실로 많은 일이 있었다. 갑오개혁 기간 동안 국정에서 소외됐던 고종은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개혁정부를 일거에 붕괴시키고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사이에 친러파에 의한 내각이 수립돼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정부 각 기관에 러시아인이 고문으로 초빙되고 군사 교관까지 들어왔다. 특히 탁지부 고문 K 알렉세예프는 국가 재정을 장악하고 한러은행을 설립해 중앙은행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구하려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부산 앞의 절영도를 조차하려는 야심까지 드러냈다. 조선왕조를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책동은 무산됐지만 러시아가 일본을 대신한 모양새가 됐던 것이다. 러시아에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貯炭所) 설치권, 압록강 삼림 벌채권과 같은 각종 이권이 넘어갔다. 다른 열강도 이에 편승해 철도부설권, 산림채굴권, 광산채굴권을 요구했으며 고종은 여러 나라에 이권을 제공하면 어느 한 나라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왕이 다른 나라의 공사관에서 기거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896년 7월 창립된 독립협회를 비롯해 유림들도 환궁을 요구하자 고종은 1897년 2월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을미사변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경복궁을 피해 외국 공관이 밀집해 ‘안전한’ 지역을 택한 것이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에는 새로 건립한 원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수립됐다(사진).
대한제국은 서구열강과 대등한 제국임을 선포
대한제국의 수립은 조선왕조가 서구 열강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과도 대등한 ‘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었다. 개화파의 독립 의지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고종의 의도가 합치돼 이뤄진 일이었지만, 청일전쟁에 의해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 공간을 제공했다. 중국은 1895년 4월 청일전쟁이 종결된 후에도 1899년 9월 대한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우리나라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갖는 것을 기피했다. 조선은 ‘자주의 나라’지만 중국과 ‘평행의 나라’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사신을 파견하지 않으며 국서도 교환하지 않는다’는 삼불(三不) 정책을 유지했던 것이다.
고종의 환궁 후 대한제국이 수립됐지만, ‘국제’가 반포되기까지 정치체제의 향배는 상당히 유동적이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은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국왕을 둘러싼 보수 세력은 이런 정치참여 요구를 체제 위기로 보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러시아와 러시아에 의존하는 정부를 비판했으며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고 의회 설립을 요구했다. 또한 10월 말 개최된 관민공동회에서는 ‘헌의 6조’를 채택해 외국에 광산, 철도, 산림 등의 이권을 부여하거나 차병(借兵)·차관과 관련된 조약을 체결할 때는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동의를 얻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보수세력은 개혁세력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수립하려고 한다는 익명서를 날조해 독립협회를 해산했다. 또 일체의 집회에 대해 민회 금압령을 발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제국 ‘국제’는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개혁세력에 대한 보수세력의 승리를 상징하는 징표였다.
한편 근대국가 성립의 기준을 달리 세워볼 수도 있다. 정치체제가 무엇이든 시장경제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역량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국가역량에서 가장 핵심적인 ‘재정능력’(fiscal capacity)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을까? 대한제국이 갑오개혁과 크게 다른 점은 갑오개혁은 탁지부로 국가재정을 집중하려고 했는데 대한제국은 황실재정을 통해 재정능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강화된 왕권을 반영해 궁내부가 대한제국 동안에 크게 팽창했으며, 특히 내장원(內藏院)에 각종 재원이 집중됐다.
본래 왕실 재산을 관리할 궁내부 산하의 기관에 불과했지만 대한제국의 가장 핵심적인 재정기관으로 부상했다. 이런 대한제국의 선택은 성공적인 대안이었을까? 대한제국은 과연 ‘재정능력 함정’(28호 참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계속)
좀 더 엄격하게 영국에서 명예혁명(1688년)으로 입헌군주제가 수립된 것을 근대국가의 기준으로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의적인 왕권의 남용을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 영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중요한 제도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프랑스혁명(1789년)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서구 역사에서 나온 ‘근대’라는 개념을 다른 세계의 역사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까?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서 ‘근대국가’를 정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근대국가의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져 일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근대국가의 기준이라면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근대국가를 수립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국왕이 전국을 군현제에 의해 직접 통치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정치체제가 서구 근대국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개항 후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분권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후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부터 만들어야 했다(廢藩置縣, 1871).
그러나 입헌군주제에 의한 왕권의 제한이 기준이라면 조선왕조는 물론이고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1899년 8월 반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이 전제군주국임을 너무나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군주가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만대불변하는 “전제정치”이기 때문에 군사, 법률, 행정, 외교와 관련된 일체의 국정이 오로지 군주 한 사람에게만 집중돼 있었다. 무엇보다 군주에게만 법률을 제정할 권리가 부여됐으며 “무한한 군권”을 “침손”하는 일체의 행위는 “신민의 도리”를 잃은 것으로 처벌 대상이 됐다.
왕권제한측면에선 근대국가 아님
이런 전제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 직속의 원수부(元帥府)가 중앙과 지방의 군부대를 지휘 감독하도록 했으며(사진), 궁내부에 경위원(警衛院)이 설치돼 서울(皇城) 내외와 개항장의 치안을 담당하고 ‘수상한 범죄자’를 감시 체포하도록 했다. 또한 국사법이나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재판에 회부된 죄인은 단심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심지어 화폐를 발행하는 전환국도 국왕 직속기관이 됐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실로 많은 일이 있었다. 갑오개혁 기간 동안 국정에서 소외됐던 고종은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개혁정부를 일거에 붕괴시키고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사이에 친러파에 의한 내각이 수립돼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정부 각 기관에 러시아인이 고문으로 초빙되고 군사 교관까지 들어왔다. 특히 탁지부 고문 K 알렉세예프는 국가 재정을 장악하고 한러은행을 설립해 중앙은행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구하려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부산 앞의 절영도를 조차하려는 야심까지 드러냈다. 조선왕조를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책동은 무산됐지만 러시아가 일본을 대신한 모양새가 됐던 것이다. 러시아에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貯炭所) 설치권, 압록강 삼림 벌채권과 같은 각종 이권이 넘어갔다. 다른 열강도 이에 편승해 철도부설권, 산림채굴권, 광산채굴권을 요구했으며 고종은 여러 나라에 이권을 제공하면 어느 한 나라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왕이 다른 나라의 공사관에서 기거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896년 7월 창립된 독립협회를 비롯해 유림들도 환궁을 요구하자 고종은 1897년 2월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을미사변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경복궁을 피해 외국 공관이 밀집해 ‘안전한’ 지역을 택한 것이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에는 새로 건립한 원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수립됐다(사진).
대한제국은 서구열강과 대등한 제국임을 선포
대한제국의 수립은 조선왕조가 서구 열강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과도 대등한 ‘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었다. 개화파의 독립 의지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고종의 의도가 합치돼 이뤄진 일이었지만, 청일전쟁에 의해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 공간을 제공했다. 중국은 1895년 4월 청일전쟁이 종결된 후에도 1899년 9월 대한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우리나라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갖는 것을 기피했다. 조선은 ‘자주의 나라’지만 중국과 ‘평행의 나라’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사신을 파견하지 않으며 국서도 교환하지 않는다’는 삼불(三不) 정책을 유지했던 것이다.
고종의 환궁 후 대한제국이 수립됐지만, ‘국제’가 반포되기까지 정치체제의 향배는 상당히 유동적이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은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국왕을 둘러싼 보수 세력은 이런 정치참여 요구를 체제 위기로 보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러시아와 러시아에 의존하는 정부를 비판했으며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고 의회 설립을 요구했다. 또한 10월 말 개최된 관민공동회에서는 ‘헌의 6조’를 채택해 외국에 광산, 철도, 산림 등의 이권을 부여하거나 차병(借兵)·차관과 관련된 조약을 체결할 때는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동의를 얻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보수세력은 개혁세력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수립하려고 한다는 익명서를 날조해 독립협회를 해산했다. 또 일체의 집회에 대해 민회 금압령을 발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제국 ‘국제’는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개혁세력에 대한 보수세력의 승리를 상징하는 징표였다.
한편 근대국가 성립의 기준을 달리 세워볼 수도 있다. 정치체제가 무엇이든 시장경제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역량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국가역량에서 가장 핵심적인 ‘재정능력’(fiscal capacity)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을까? 대한제국이 갑오개혁과 크게 다른 점은 갑오개혁은 탁지부로 국가재정을 집중하려고 했는데 대한제국은 황실재정을 통해 재정능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강화된 왕권을 반영해 궁내부가 대한제국 동안에 크게 팽창했으며, 특히 내장원(內藏院)에 각종 재원이 집중됐다.
본래 왕실 재산을 관리할 궁내부 산하의 기관에 불과했지만 대한제국의 가장 핵심적인 재정기관으로 부상했다. 이런 대한제국의 선택은 성공적인 대안이었을까? 대한제국은 과연 ‘재정능력 함정’(28호 참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