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8) 재정능력 함정과 갑오개혁
조선왕조는 500년을 유지한 발군의 내구성을 지닌 국가였지만, 개항의 충격에 대응하기에는 국가역량(state capacity)이 부족한 ‘약한 국가’(weak state)였다. 국방과 치안을 비롯한 공공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였으며, 시장경제에 필요한 제도를 갖추고 공업화를 위한 산업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였다.

무엇보다 국가역량의 기본이 되는 ‘재정능력’(fiscal capacity)이 매우 취약하였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 하에서 평화가 장기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재정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재정규모가 작았으며(중앙세입 쌀 환산 100만석, 조세부담률 3% 추정), 재정 곤란으로 시전상인이나 공인에 대한 채무가 누적되었다. 개항 이후 외교사절의 파견과 근대화 사업 등으로 지출이 급증하자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도 하였지만 관세 수입을 담보로 잡히고 해관 운영권도 빼앗겼기 때문에 재정운영은 더욱 곤란해졌다.

재정강화와 시장경제 발달 위한 시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84년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조선왕조 체제를 근대국가 체제로 바꾸기 위한 ‘갑오개혁’(1894년 7월~1896년 2월)이 약 19개월간 시도되었다. 갑오개혁은 국가의 ‘재정능력’을 강화하고 신분제와 특권을 철폐함으로써 시장경제를 발달시키려는 방대한 개혁이었다.

갑오개혁 정부는 우선 국가 재정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단일한 재정기관에 모든 국가재정을 집중함으로써 경비를 절감하고 중간유출을 막는 정책을 폈다. 당시 중앙 재정기관으로 호조가 있었지만 실제 수입은 전세뿐이었고 대동미는 선혜청에서, 군포는 병조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관청마다 저마다 크고 작은 재원을 보유하는 분산적인 재정구조를 폐지하는 대신 탁지아문(1895년 4월에 탁지부로 개칭)으로 하여금 재정운영을 총괄토록 하였던 것이다. 국가재정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왕실재정은 궁내부를 설치하여 정부 재정과 분리하였다.

이와 함께 현물로 받던 조세를 모두 돈으로 받도록 하였다(조세금납화). 동전 외에 쌀, 포목을 비롯한 다양한 현물을 수취하는 방식으로는 통합된 회계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화폐제도도 개혁하여 은본위제도를 수립하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된 세금도 정비하여 토지에 대해서는 지세, 호(戶)에 대해서는 호세로 통합하고 ‘무명잡세’(無名雜稅)라고 불려지던 법에 없는 비공식적인 조세는 모두 폐지하였다.

개혁정부가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거나 세율을 높이지 않았던 것은 조세 저항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재정집중을 통해 재정수입이 상당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방의 조세 행정 단위를 줄이고 이서층(향리)을 정리함으로써 재정지출을 감축하는 한편 지방재정을 국가재정에 완전히 통합할 계획이었다. 당시 지방재정 규모는 대략 국가재정의 1/2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중간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조세행정으로부터 지방관과 이서층을 분리하는 한편, 탁지부가 관장하는 관세사(管稅司), 징세서(徵稅署)를 전국에 설치하여 지방민으로부터 조세를 직접 수취하고자 하였다.

특권과 무명잡세 모두 폐지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8) 재정능력 함정과 갑오개혁
갑오개혁 정부는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개혁도 다방면으로 추진했다. 우선 시전과 공인제도를 폐지하여 정부에서 필요한 재화를 시장에서 구입하도록 했다. 무질서한 상업부문에 대한 과세를 정리하여 국법에 근거한 세금만 남기고 ‘무명잡세’는 폐지하였으며, 개항 후 회사들에 부여된 독점권도 모두 환수하였다.

본래 조선시대에 상업에 대한 조세는 국가의 관심밖에 있었다. 균역법(1750년)이 시행된 다음에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어염선세(魚鹽船稅)를 균역청에서 거두게 되었지만, 어장, 소금가마, 선박과 같은 생산 설비에 대해 부과한다는 성격이 강해 판매와 소비에 대한 조세는 정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도적 공백을 이용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청이나 왕실과 토호들이 ‘무명잡세’를 거두었는데, 이는 국가 재정에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도 상업활동을 침해하여 시장경제 발달을 저해하고 있었다.

포구나 상업의 중심지에는 객주들의 영업권이 재산으로서 매매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객주들에게 영업을 허가하고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도객주’(都客主)와 같은 자들도 출현하였다.

수상교통의 요충지에는 통과 선박이나 물품에 대해서 ‘백일세’(百一稅)와 같은 명목으로 세금을 걷는 자들도 있었다. 보부상도 단체를 이루고 혜상공국(惠商公局, 1883년)과 상리국(商理局, 1885년)의 관할에 들어가 행상을 독점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갑오개혁은 이러한 무명잡세와 특권을 전면 폐지함으로써 자유로운 영업과 경쟁을 통해 상업과 시장경제가 발전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은본위제도 시행에 못 옮겨

갑오개혁은 그러나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중앙재정은 통합할 수 있었지만 지방재정은 국가재정에 흡수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징세기관도 설치하지 못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진 지방제도를 급격히 개편하는 데 대한 반발이 컸으며 지방관과 이서층을 조세행정에서 배제하는 계획도 실현되기 어려웠다.

징세와 관련된 정보는 모두 이서층이 가지고 있었고 징세장부는 다른 사람이 해독하기도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관을 근본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토지와 인구를 정확히 조사하고 새로운 과세기준을 마련해야 하였지만 빈약한 재정으로는 착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조선왕조의 취약한 재정능력은 재정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재정능력이 강화되지 않는 ‘재정능력 함정’(fiscal capacity trap)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Pillars of Prosperity, 2011).

일본에 대한 지나친 의존, 협소한 지지기반, 국왕(왕실)과의 대립이 갑오개혁을 좌절시킨 요인이나, 화폐제도와 금융산업의 발전이 지체되었던 것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실패 요인이었다. 개혁정부는 은본위제를 실시하고 은행을 설립하여 조세수납과 운송을 대행시킬 계획이었지만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은본위제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취약한 재정으로 은과 교환할 수 있는 태환권을 발행할 수 없었으며, 금융산업의 미발달로 외국(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8) 재정능력 함정과 갑오개혁


궁여지책으로 쌀과 동전의 원활한 순환을 위해 경강(京江·지금의 한강) 상인이 설립한 미상회사(米商會社)로 하여금 지방에서 거둔 세금으로 쌀을 구입, 서울로 운반하도록 했지만 소규모에 그쳤다. 오히려 세금을 돈으로 내도록 한 후 지방관리가 세금으로 받은 돈을 상인에게 맡겨 영리활동에 활용하는 관행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오개혁이 계획한 재정집중이 달성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