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성향의 일본 총리
취임 퍼레이드 도중 폭탄테러로 암살 당해
한 시대 이끌었던 아이콘 상품들 영화 소품으로 사용
'응답하라 1994' 처럼 복고 감성 자극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골든 슬럼버’로 본 시대의 아이콘들
2010년 8월 개봉한 ‘골든 슬럼버(golden slumber)’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골든 슬럼버’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반미 성향을 가진 젊은 신임 총리가 취임 퍼레이드를 하는 도중 폭탄테러로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에 앞서 현장 부근에선 택배기사인 아오야기가 대학 시절 친구인 모리타와 오랜만에 재회하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친구는 “너는 곧 총리 암살범으로 지목당할 거야. 도망쳐!”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곧 총리가 탄 차량에 원격조종된 헬기 폭탄이 날아들고 모리타가 탄 차량도 폭발한다. 아오야기는 영문도 모르는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가 암살현장에 있었음을 증언하는 목격자, 헬기 폭탄을 조종하고 있는 아오야기의 증거 영상 등이 차례로 공개되고 그의 모든 과거는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증거가 된다. 아오야기는 그를 사살하기 위해 다가오는 경찰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결백을 증명해야만 한다.취임 퍼레이드 도중 폭탄테러로 암살 당해
한 시대 이끌었던 아이콘 상품들 영화 소품으로 사용
'응답하라 1994' 처럼 복고 감성 자극
추억의 감성코드
이 영화는 화려한 액션이나 스펙터클은 없지만 일본 문화콘텐츠 특유의 아기자기한 구성과 스토리로 관객들을 빨아들인다. 무엇보다도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심리적·정서적 코드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비틀스의 노래 ‘골든 슬럼버’와 도요타의 코롤라 자동차는 공교롭게도 탄생연도가 1960년대로 엇비슷하다. 반면 주인공이 애지중지하는 애플의 아이팟나노와 막판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아이돌 스타는 현대 소비문화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 서른 살의 나이에 불과한 주인공에게 40년을 오르내리는 영화적 소품들을 제공한 이유는 연출자가 리얼리티보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현대 일본인 특유의 감성적 코드를 더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필 주인공의 도주 수단으로 낡아빠진 코롤라를 선택한 이유는 흥미롭다. 코롤라는 곤경에 처한 주인공이 옛 애인 하루코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길가에 방치돼 있던 자동차에 올라타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20년 전의 대학가 풍경을 그린 드라마로 요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1994’처럼 흘러간 시절의 감성적 코드를 복원하는 영화적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롤라는 1966년에 초대 E10형이 발매돼 1969년부터 2001년까지 33년 연속 일본 국내 판매순위 1위를 차지한 불세출의 명차다. 단일 차종으로는 최다인 3000만대의 생산을 기록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차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루코가 배터리를 사러 들어간 가게 안에서 혼자 흥얼거리는 ‘혼자라도 좋아, 둘이어도 좋아, 셋이어도 좋아~ 조금 기쁜 코롤라’라는 노래는 실제 1971년에 제작된 광고 테마송이다. 이 노래를 아이팟나노를 갖고 있는 주인공 세대들이 기억하고 부르는 장면은 일본의 세대교체 속도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코롤라는 도요타를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알린 차량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1957년 일본 업체로는 처음 크라운 승용차를 미국에 내놓았던 도요타는 이 차를 앞세워 1970~198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이 휘몰아쳤던 불황기에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다.
코롤라 vs 렉서스
코롤라의 성공은 렉서스가 이어받게 된다. 1983년 8월 당시 도요타 에이지 회장은 비밀리에 중역회의를 소집하고 “세계 최고와 어깨를 겨루는 품격 있는 차를 창조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F1 프로젝트’ 가동을 지시했다. 여기서 F는 각 브랜드 최고의 차량을 일컫는 ‘플래그십(Flagship:최고를 뜻함)’, 숫자 1은 넘버원 자동차를 뜻했다.
F1 프로젝트는 도요타의 경험과 기술을 최대한 반영하되 기존 제품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브랜드를 창조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1989년 9월1일, 렉서스의 첫 모델이자 기함인 ‘LS400’이 미국에 출시되자 전 세계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4L 250마력의 엔진을 장착한 이 모델은 시동을 건 지 불과 7.9초 만에 시속 60마일까지 가속할 수 있는 성능을 선보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으며 경쟁 브랜드들보다 더 빠르고 더 우수한 연비를 가진 것이었다. 실내는 세계 최고의 오디오 시스템을 갖췄고 미국 시장에 출시된 모델 중 가장 조용한 것으로 평가됐다.
업계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세계 고급차 시장을 양분하던 독일계 브랜드의 경쟁 모델보다 3만달러 이상 저렴했다는 점이다. 벤츠 BMW와 맞먹는 품질과 성능에 가격은 훨씬 저렴했던 것이다. 세계적 자동차 시장조사업체인 JD파워가 그동안 렉서스를 품질 및 서비스지수에서 무려 100여차례나 1위에 올려놓은 배경이기도 하다.
바로 이 렉서스가 영화 속에서 취임 퍼레이드를 펼친 총리의 의전 차량으로 등장한 것은 일본인들이 렉서스 브랜드를 코롤라만큼이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애플의 질주 코드를 담다
영화 타이틀이자 코롤라와 함께 이 영화의 감성적 코드를 떠받치고 있는 ‘황금빛 졸음, 선잠’이란 뜻을 지닌 ‘골든 슬럼버’는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1969)에 수록된 곡이다. 당시 비틀스 멤버 간의 사이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폴 매카트니가 동료들에 대한 옛 추억과 애정을 담아 완성한 이 곡은 총리 암살사건을 통해 재회하게 되는 주인공과 옛 친구들의 우정을 상징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고리로 사용된다.
주인공이 이 흘러간 노래를 아이팟나노를 통해 듣는 장면은 초기 산업화 시대와 후기 정보화 시대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묘한 느낌을 준다. 비록 지금은 삼성전자에 추격을 허용했지만, 애플은 아이팟나노-아이폰-아이패드의 잇따른 성공으로 글로벌 정보기술(IT)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업이다. 고(故) 스티브 잡스 시절의 기상천외한 발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아오야기가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한 아이팟나노 덕분에 경찰이 쏜 총알을 맞지 않는 장면은 당시 애플의 질주 코드에 대한 존경을 한가득 담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영화적 비약이 너무 심했던 것이 아닐까. 최고에 바치는 일본인 특유의 헌사가 작용한 것일 게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경제부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