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도로시가 은색구두의 힘으로
금 상징 노란 벽돌길따라 캔자스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은본위제 개혁 지지 보여줘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오즈의 마법사’ 를 통해 본 국제통화체제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무지개 너머 어딘가 저 높은 곳에~자장가 속에나 나오던 그런 곳이 있어요~)금 상징 노란 벽돌길따라 캔자스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은본위제 개혁 지지 보여줘
미국의 제작사 MGM이 1939년에 만든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Over the rainbow’라는 주제가로도 유명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만든 빅터 플레밍이 메가폰을 잡았다. 미국의 동화작가 프랭크 바움(1856~1919)이 쓴 불멸의 작품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1900년)가 원작인 이 영화는 ‘도로시’라는 소녀가 회오리바람에 날려 오즈라는 마법의 나라에 떨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도로시와 그의 개 토토, 그리고 두뇌는 없지만 말을 할 줄 아는 허수아비, 양철로 만들어진 나무꾼,겁 많은 사자 등이 힘을 합쳐 갖은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스토리는 연극 영화로도 상영돼 청소년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디플레이션 20년의 그늘
2009년 9월에는 영화개봉 70주년을 기념해 미국 전역의 400여개 영화관에서 디지털로 복원된 ‘오즈의 마법사’가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는 도로시의 은색구두가 진홍색으로 바뀌었다는 점 외에는 소설의 내용을 충실히 담았다. 주디 갈랜드의 노래 실력과 환상적인 모험을 담은 스토리는 전 세계 어린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원작자 바움이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를 쓴 데는 미국도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의 작품 못지않은 자국 동화를 내놓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소망대로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는 유럽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출간 첫해에 2만5000권이나 팔려나간 것.
하지만 바움이 순전히 동화를 만들겠다는 취지로만 작품을 쓴 것은 아니다. 소설이 출간될 당시 미국은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미국은 1880년께부터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의 양이 부족해 원하는 만큼 돈을 찍어 낼 수 없게 됐다. 그 여파로 20여년간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화폐가치가 오르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것. 금본위제에서 중앙은행(당시 미국은 주정부은행)은 금 보유량만큼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경제활동에 필요한 만큼의 화폐를 충분히 찍어내지 못했다. 이에 따라 화폐가치가 급등하면서 주로 돈을 빌리는 입장인 일반 서민 노동자들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게다가 디플레이션은 경기침체와 동반하는 경향이 강해 당시 미국의 고용률은 떨어지고 임금도 계속 하락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농민과 근로자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은본위제 도입을 주장하게 된 배경이다. 상대적으로 값싸고 덜 희소한 은을 기준으로 더 많은 화폐를 발행해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자는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대선주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공약으로도 나타났다. 미국 역사상 가장 포퓰리즘적이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그는 1896년 대선에서 은본위제를 주창하고 나섰다. 비록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에 석패하긴 했지만 당시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은색 구두 vs 붉은 구두
물론 바움이 명시적으로 은본위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즈(Oz)가 금, 은 등을 재는 무게 단위인 ‘온스(ounce)’의 약자이고 주인공 도로시가 불가사의한 은색 구두의 힘으로 금을 상징하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는 끝 부분의 이야기는 작가가 은본위제 개혁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작품에 나온 양철인간, 허수아비, 회오리바람, 마녀, 마법사, 사자, 난쟁이는 1890년대 정치풍자 만화에서 아주 흔하게 등장하던 상징이었다. 당시 만화에서 허수아비는 농민, 양철인간은 산업노동자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격변의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기계화된 서민의 모습을 의미한 것. 따라서 양철인간과 허수아비가 작품 안에서 힘을 모으는 것은 바로 농민과 산업노동자의 동맹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또 도로시가 오즈의 나라에서 만나는 난쟁이는 평범한 미국의 시민을 상징하며, 이들을 지배하던 서쪽마녀와 동쪽마녀는 바로 기업과 금융 등의 산업화 세력을 은유한다. 정치인은 마법사로 표현됐다. 회오리바람 또한 당시 제3당인 민중당의 출현 등과 같은 정치적 격변기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결과적으로 ‘오즈의 마법사’는 디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당시의 정치 경제 상황을 풍자한 동화면서 동시에 은본위제를 대중에 널리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다만 영화는 은구두를 붉은 구두로 바꿈으로써 동화에 자리잡고 있던 정치색을 뺐다. 이는 단지 “화면에 은빛이 잘 먹히지 않는다” 는 플레밍 감독의 판단(←도로시 구두가 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뀐 이유는)에서였다.
재닛 옐런의 기억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미국 달러화는 금본위제나 은본위제 없이도 세계의 기축통화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이 독자적 유로화 체제를 구축하고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위안화의 미래 기축통화 가능성을 흘리고 있지만 달러화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미국은 자국 기업에 대한 구제금융과 경기부양 등을 위해 무려 7조달러에 달하는 돈을 풀었지만 달러화 가치는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적완화 축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 국채보유 1위 국가인 중국은 미국 경제·금융 불안에 따른 금리 상승이 자국 보유채권의 가치 폭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이 같은 달러화의 힘은 바로 미국 국력에서 나온다. 미국은 정치 군사적으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다. 하지만 경제적 맥락에서 봤을 때 미국 달러화의 진정한 가치는 전 세계를 향한 구매력에 있다. 미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국이면서도 전 세계의 제품을 기꺼이 사주고 있으며, 보호무역이 아닌 자유무역을 일관되게 주창하고 있다. 이것이 중국 일본 등 다른 경제 대국과 다른 점이다.
미국의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넘어선 상황임에도 최근 오바마 행정부가 향후 10년간 1조7000억달러의 예산을 필요로 하는 일명 ‘오바마케어’를 추진하고 있는 것도 흔들리지 않는 달러화의 가치, 미국 중앙은행(Fed)의 무한 발권력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다. Fed 100년 역사상 여성으로 처음 의장이 된 재닛 옐런도 동화나 영화로 ‘오즈의 마법사’를 수차례 봤을 것이다. 그에게 도로시의 은구두는 애잔한 추억이 아니라 끔찍한 시절의 옛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달러를 찍고 싶어도 ‘그놈의 금태환제’에 묶여 한숨만 쉬던 시절의….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경제부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