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선 지식인이 그린 이상 국가의 모습
[한 문장의 교양] (15)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한 조선 지식인이 그린 이상 국가의 모습

오늘 살펴볼 한 문장입니다. 모두 알듯이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는 허균(許筠·1569~1618)입니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와 같은 평이 남을 정도입니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명나라까지 이름을 떨쳤던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그의 누이입니다. 허균 자신도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손곡 이달을 사사하고 20대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습니다. 이쯤 되면 얌전하고 바른, 하지만 어딘가 답답해 보이는 양반집 도련님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점잖은 도련님이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일까요?

출신답지 않게 허균의 삶은 조금 괴이했습니다. 유교를 따르는 사대부임에도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들과 가까이 지냈고, 기생을 집에 들여 함께 살았으며, 서자(庶子)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고, 허구적인 이야기를 즐겨 짓곤 했습니다. 미워하는 이도 많아 파직과 복직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결국 역모죄로 처형되어 죽음마저 평범치 않았습니다. 의적이 주인공인 위험한 소설을 쓴 것부터 독특합니다. 그런데 생애를 살펴보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가 24세가 되던 해에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입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그의 나이 30세. 20대 대부분을 참혹한 전쟁 속에서 보낸 것입니다.

끔찍한 전쟁의 체험, 절망스러운 조선의 현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강렬한 갈증. 청년 허균의 마음을 가득 채운 목록들입니다. 실제로 그는 조선 사회에 대한 차가운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홍길동전』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 사회에 대한 구상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대의 지식인이 본 조선의 문제점과 대안 사회의 밑그림, 이 소설을 이렇게 읽어도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어디 한번 그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선 소설 속 주인공인 홍길동이 처한 상황부터 살펴보죠. 그가 이상 국가를 꿈꾼 이유와도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자신이 천하게 난 것을 스스로 가슴 깊이 한탄하였다.”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 때문에 양반집 자제에 비범한 능력까지 지녔음에도 출사(出仕)하지 못했죠. 그는 꿈을 꿔보기도 전에 세상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즉, 출신은 그에게 벗어날 수 없는 원죄였습니다. 억울한 것은 그뿐 아닙니다. 천한 신분에 걸맞지 않는 탁월한 재능은 도리어 화가 됩니다. 주변의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가족은 그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도망치듯 집을 나왔고 눈물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단지 당시의 사회적 모순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필경 분노를 쏟아내며 자신을 망치거나 모든 걸 포기하고 은둔하기 쉽습니다. 길동 또한 분노를 품고 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품은 분노는 한편으로는 이상 국가를 향한 꿈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집을 떠난 홍길동은 의적이 됐습니다. 의적은 물론 도둑입니다. 하지만 의로운 도둑입니다. 길동의 이야기가 인상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고통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시야를 전환한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건드리지 말고, 각 읍 수령과 방백들이 백성에게서 착취한 재물을 빼앗아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할 것이니, 이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活貧黨)’이라 하리라”

홍길동은 활빈당을 결성하고 의적 활동을 합니다. 그는 사회적 모순 때문에 고통받는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격노하여 길동을 잡아들이라 명령을 내립니다. 재밌게도 길동과 임금 모두 자신이 하늘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임금은 길동이 하늘의 뜻을 어기고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고, 길동은 자신이 천명을 따르고 있으며 오히려 탐관오리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응수합니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임금에게 던진 길동의 말이 놀랍습니다.

“일찍이 백성의 재물은 털끝만큼도 뺏은 적이 없고, 수령의 뇌물과 불의한 놈의 재물을 빼앗아 먹고, 간혹 나라 곡식을 도적하기는 했으나 임금과 아비가 한몸이니 자식이 아비 것을 좀 먹었다고 도적이라 하겠사옵니까? 어린 자식이 어미 젖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자식을 품어주는 게 아비의 도리이고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게 나라의 본질이 아니냐는 반문이며, 임금과 대신들이 먼저 인륜과 천명을 어겼다는 항변입니다. 백성을 먹이고 보호해야 할 나라가 오히려 그들을 가혹하게 수탈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길동만이 가난한 백성을 돌봅니다. 진실로 나라를 위하고 진정으로 하늘의 뜻을 따른 이는 누구일까요. 길동의 말 한마디에 도적은 의적이 되고, 충신은 역적이 됩니다. 임금은 자식을 버린 아비가 되고 백성의 저항은 정의를 향한 외침이 됩니다. 헐벗고 가난한 백성의 아픔을 품지 않는 한, 임금이 말하는 나라는 양반만을 위한 나라요, 대신들이 말한 천명이란 폐쇄적 신분질서를 뒷받침하는 잿빛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린 길동의 이야기를 통해 한 조선 지식인이 꿈꾼 이상 국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는 것은, 별달리 ‘권리’라고 표현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홍길동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허균이 새로운 나라를 꿈꾼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다른 이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 나의 아픔을 통해 너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아픔의 보편성에 기대 억압과 차별 없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허균이 『홍길동전』을 통해 말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소설을 달리 읽을 수 있는 여지도 있습니다. 결말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임금이 회유책으로 병조판서란 벼슬을 내리자 길동은 그 은혜를 칭송하며 조선을 떠납니다. 밑동까지 썩은 조선의 현실은 여전하며 백성의 고통 또한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입신양명이라는 꿈을 이뤄 서자로서의 한을 풀자 길동은 백성들의 아픔을 외면해버립니다.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율도국이라는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는 스스로 왕이 됩니다. 백성의 고통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에 타인의 피를 묻힙니다. 그렇게 의적은 다시 도적이 됩니다. 심지어 여러 명의 부인을 얻더니 첫째 부인의 자식 외에는 모두 서자로 만듭니다. 소설은 긴 이야기를 거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홍길동전>이 보여준 ‘이상’뿐 아니라, 어이없는 ‘실패’ 또한 우리에게는 고민의 대상입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