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94> 미국 남북전쟁은 인권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북전쟁 하면 노예 해방을 위해 남과 북이 다툰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노예들의 인권 유린을 막기 위한 링컨 대통령의 노력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도 많은 초등학생들이 존경하는 위인을 꼽으라면 링컨 대통령을 꼽으며, 그 이유 역시 사회적 약자인 노예의 인권 문제를 위해 헌신한 선의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곤 한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은 흑인 인권 문제를 놓고 전쟁까지 감수했던 나라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민족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인들은 서로 전쟁까지 감수했을까? 특히 남북전쟁은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1861년부터 5년간 지속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당시 미국 백인 인구의 6명 중 1명이 참전하여 그 가운데 3명 중 1명이 사망한 처절한 전쟁이었다. 정말 미국인들은 다른 인종의 인권을 위해 이처럼 치열하게 싸운 것일까?

남북전쟁에서 인권문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남북전쟁이 촉발된 근본적인 문제는 노예제도의 인권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아니라 남과 북의 상이한 경제구조로 인해 노예라는 노동력에 대한 상이한 평가에 근거하였으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과 북의 상이한 산업 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

남과 북의 상이한 산업구조


북부는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고 남부는 농업 중심으로 발달해 가면서 상이한 경제 구조를 갖추게 되면서 남과 북은 더욱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부 지방은 농업 위주, 북부 지방은 상공업 위주로 진행되어 온 것은 식민지 시절부터였다. 남부는 당시 영국 귀족층을 중심으로 흡연 문화가 크게 확산되면서 담배 생산을 통해 커다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조면기(cotton gin)의 발명 이후에는 목화 생산을 통해 커다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화와 담배 생산에 있어 노예는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였다.

사실 처음부터 남부 지방 사람들이 흑인 노예를 활용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백인 노동자를 활용하려 했었다. 하지만 남부는 준열대성 기후라서 백인 노동자들이 일하길 꺼렸으며, 백인들은 굳이 광활한 미국 대륙에 남아도는 것이 땅인데, 새로 분양을 받으면 받았지, 다른 백인 밑에서 일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은 계약하인이었다. 계약하인은 미국으로 이주할 비용이 없는 사람을 이주시켜주는 대신 그 대가로 일정 기간 하인으로 일하거나 범죄자들이 일정 기간 하인으로 일하면 죄를 사면해 주는 경우 두 가지가 있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자유인이 되기 때문에 연속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부 지방의 대농장주들은 점점 더 흑인 노예를 선호하게 되었고, 흑인 노예는 그들의 경제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상공업 중심으로 발달한 북부에서는 노예는 중요한 생산요소가 아니었으며, 노예를 기반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한 남부인들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기에 이른다.

1789년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상태로 돌입하면서 미국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된다. 자국의 상품을 수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미국 경제가 유럽을 대상으로 한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상황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타계하기 위해 ‘제이 조약(Jay’s Treaty)’을 영국과 체결하는데, 이는 남과 북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다. 제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영국에 몇 가지 사항을 양보하기에 이르는데, 그 중 영국 상인이 미국에 갖고 있던 부채를 탕감해 주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 상인이 갚지 않고 있던 부채의 대부분은 남부 지방 사람들에 대한 부채였기 때문에 남부 지방 사람들은 이 조약 체결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남과 북의 경제 구조는 점점 더 상이한 형태로 진화해갔다. 북부는 산업화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국가의 부가 북쪽으로 점점 치우치는 현상이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북쪽 지역에는 많은 이민자가 유입되었고, 인구 증가로 인해 북쪽 지역의 하원 의원 수는 점점 증가하였다. 반면 남부 지방은 노예를 기반으로 한 목화 재배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목화 재배가 가능한 토지가 점점 줄어들 뿐만 아니라, 목화 가격까지 하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부분의 남부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의 땅인 서부로 이주해 가면서 남부의 입지는 더욱 더 악화되기 시작한다.

궁지에 몰린 남부의 경제

상이한 경제 구조로 인한 남과 북의 갈등은 관세 문제에서 극에 달하게 된다. 관세 문제는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노예 문제와 함께 가장 본질적인 문제였다. 북부는 관세를 높여야 유리했고, 남부는 관세를 낮춰야 유리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 지방의 이익을 대변하던 해밀턴 정부는 관세를 높여 외국 상품의 유입을 막고 국내 제조업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남부 지역 사람들은 농산물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면화를 수출하여 얻은 수익으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만약 미국 정부가 관세를 올리면 상대국에서도 보복 관세를 부과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면화 수출에도 크게 타격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이러한 경제구조로 인한 미국 사회의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링컨은 노예제도 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고조된 시점인 1856년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추구하던 공화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복귀한다. 링컨은 곧이어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데, 이제 막 정치를 재개한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급진적인 노예해방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여러 차례 자신은 남부 지역의 노예를 무조건적으로 즉시 해방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으며, 1861년 3월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도 “나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의 연방으로 미국을 유지하는 것이지, 노예제도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노예해방주의자는 곧 북부 경제 구조를 중시하는 인물로 치부되었던 시절, 링컨은 자신의 당선으로 남부 지역이 동요할 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1862년 미 농무부를 창설하였으며, 농무부 이름을 국민의 부처(People’s Department)라고 정하였다. 즉, 남부 지방의 경제 구조는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분야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94> 미국 남북전쟁은 인권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이상의 이러한 사실들은 링컨이 단순히 노예 해방 문제를 인권 문제로 국한시켜 생각하지 않고 미국의 남과 북이 직면한 경제구조 속에서 풀어가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시점 역시 1862년으로 장기간에 걸친 남북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시점이다. 링컨이 이때 노예 해방을 선언한 것은 수세에 몰린 남군의 경제적 근간을 뒤흔들고, 오랜 전쟁에 지친 자신의 지원자인 북부 지역 사람들의 지속적인 협조와 해외 여론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노예해방 선언으로 인해 전황은 더욱 급속히 북군에 유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남북전쟁은 인류가 수행한 여타의 수많은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이권 내지 경제 문제로 인해 촉발된 전쟁 중 하나이지, 노예 해방이라는 인권 수호를 위한 선의의 전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남북전쟁은 상이한 이해관계, 상이한 경제적 구조가 얼마나 극단의 상황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전달해 주는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aijen@kdi.re.kr


경제 용어 풀이

▨ 경제 구조

사회의 토대가 되는 생산 관계의 총체로 각 경제 부분이 전체 경제 시스템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어떻게 다른 경제 분야와 상호 연관돼 있는지에 대한 관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