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스토리 - 오이켄 사상의 힘
발터 오이켄이 살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집단주의가, 인식론적으로는 역사주의, 실증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대안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 질서자유주의다. 그는 독일이 직면하고 있던 갖가지 경제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없는 역사주의의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파와 결별하고 시장이론의 중요성을 인식한 나머지 이론 개발에 진력했다. 사회주의는 자유를 박탈하기에 실패한 이념이라고 믿었다. 적자재정, 저금리, 신용확대를 통한 케인스의 완전고용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가격을 왜곡시켜 불황을 몰고 온다고 경고했다. 그에게는 제3의 길도 없었다. 각종 시장들은 상호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시장에 개입하면 그 시장뿐만 아니라 이와 대체관계 또는 보완관계에 있는 시장들까지도 왜곡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거대담론가였던 오이켄은 1940년대 초부터 독일 사회가 나아갈 길을 이론적, 정책적으로 모색했다. 그는 비밀리에 교수 및 대학원생들과 함께 법과 경제 그리고 질서사상과 관련해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 소식이 암암리에 알려지자 독일 전 지역에서 참석자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나치즘 비밀경찰의 수색과 압수, 감금 등으로 세미나를 지속하지 못했다.
나치즘이 끝나자 초미의 관심은 독일 사회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문제였다. 정치권과 사회 전체가 분열돼 방황했다. 독일 사회가 갈 방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 오이켄의 질서사상은 독일 사회의 혼란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학파’를 조직해 독일 경제를 친자유시장으로 개조하기 위한 운동의 전방에 서서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당시 자유주의자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경제장관이 됐고 오이켄은 그의 자문위원이 돼 독일 개혁에 착수했다. 통화개혁과 중앙은행의 독립, 가격규제 철폐 등에서 그의 이상을 성공적으로 추진해갔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호텔 방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유주의의 구심점을 잃은 것이다. 애석한 것은 독일 경제가 그의 사상을 기반으로 해 전대미문의 번영을 누렸음에도 그가 이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오늘날 독일 자유주의 경제학의 구심점이 돼 생생히 살아 있다. 그것은 제도적 틀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질서정책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 고유한 경제학으로서 프라이부르크학파의 ‘질서경제학’으로 발전해 시카고학파나 오스트리아학파와 경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