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72) 아시아 최초의 선물 시장, 오사카 거래소
금융시장이 발달한 나라 하면 미국, 영국 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나라 역시 보기 드문 이력을 하나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파생상품 시장에서 거래량 기준으로 세계 1위인 나라이다. 파생상품이란 해당 상품의 가치가 다른 무엇가의 가치에 근거해 결정되는 상품을 말한다. 예를 들어 채권이나 외환의 가치가 변화함에 따라 그에 파생해 함께 가치가 변하는 금융상품이 있다면 이 상품은 파생상품으로 분류된다. 원래 미래에 있을 가격 변화에 따르는 손실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됐다. 대표적인 파생상품인 선물(future)거래와 선도(forward)거래의 경우 미래, 앞날 등을 의미하는 future, forward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현재 쌀 한 가마 가격이 10만원인데, 앞으로 6개월 뒤에는 쌀 가격이 15만원으로 인상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상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상인은 6개월 뒤에 쌀 한 가마를 11만원에 구입하는 내용의 계약을 누군가와 체결한다. 6개월 뒤에 쌀 가격이 14만원으로 4만원 올라도 이 상인은 자신이 구매한 선물 상품으로 인해 쌀을 시세보다 3만원 싼 11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이러한 계약을 선물거래라고 한다.

상품가격 하락 손실 막아

상품 가격이 하락해 손해를 막기 위해서도 선물거래가 유용하다. 거꾸로 쌀 한 가마를 11만원에 6개월 뒤에 판매하는 내용의 선물계약을 체결했는데, 6개월 뒤 한 가마당 가격이 6만원으로 하락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시세보다 5만원 비싼 11만원에 판매할 수 있어 가격 하락에 대한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파생상품은 농산물 가격이 변함으로 인해 입게 될 손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등장했다. 19세기 미국 시카고는 중서부 지역에서 생산한 옥수수, 콩, 밀 등이 모여 거래되는 중심지였다. 수확기가 되면 한꺼번에 많은 곡물들이 시카고지역으로 몰려들게 되는데, 시카고 내부에는 이를 충분히 수용할 만한 창고가 없었다. 겨울철에는 운하가 얼어 아예 운송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운송되지 못한 곡물들은 헐값에 거래되지만 운송만 되면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 1948년 미국 시카고에서 상품거래소(Chicago Board of Trade: CBOT)가 설립됐다. 운송 여부와 상관없이 곡물을 안정적으로 거래하자는 취지로 선물거래가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시카고가 최초의 선물거래는 아니다. 17세기 일본 에도 시대에 오사카에서 쌀 선물거래가 도입돼 널리 활용됐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일하고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거점으로 삼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민은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들이 독립해 군벌이 되면 또다시 전국시대의 혼란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사카, 최초의 쌀 선물거래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독자적인 경제권을 박탈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다이묘가 영지에서 거둔 쌀을 재량껏 처분하지 못하도록 전국의 쌀을 한데 모으는 독특한 제도가 도입된 배경이다. 당시 쌀은 일종의 화폐처럼 쓰였다. 다이묘의 세력은 대개 영지에서 쌀이 몇 만석(가마) 생산되느냐로 측정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을 도쿄와 오사카에 일단 모았다가 다시 분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오사카지역의 나카노지마에 있는 각 번의 창고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쌀이 모여들다보니 이를 관리하고 거래하기 위한 다양한 기법들이 도입됐다. 선물거래도 이 과정에서 채택됐다. 농산물은 기후 변화에 따라 공급과 가격의 등락이 심하다. 오사카 상인들은 미리 돈을 주고 쌀을 사는 방식으로 물건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미리 10석 단위로 현금과 같은 선납 수표를 주기 시작했다. 쌀을 파는 번 입장에서는 미리 일정한 값을 받고 쌀을 팔 수 있었기에 이러한 거래 방식을 선호하였고, 상인들 역시 언제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의 쌀을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의 거래를 좋아했다.

이런 거래 방식이 선호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쌀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비용들 때문이었다. 각 지역의 다이묘들은 자신들이 거둔 세금인 쌀을 오사카로 올려 보내는 과정에서 운반 비용, 보관 비용 등 여러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따라서 오사카로 보낸 쌀이 헐값에 팔리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선납 수표를 통한 선물 거래 방식이 도입되면서 다이묘들은 이러한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쌀의 선납수표는 쌀값이 오르내림에 상관없이 항상 예정된 일정 금액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72) 아시아 최초의 선물 시장, 오사카 거래소
특히 지방의 성주들은 바쿠후로부터 재산 몰수 등의 명을 받게 되거나 파산을 하더라도 재산 회수 품목에서 선납 수표는 제외됐기 때문에 지방 성주들의 선물거래의 참여도는 더욱 높아졌다.

화폐처럼 쓰인 선납수표

쌀의 선납수표가 활발히 거래되면서 쌀의 유통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화폐로서의 기능도 갖게 되어 당시로서는 유용한 자산 보유 형태로 부각됐다. 쌀을 취급하지 않는 상인들도 이러한 선납수표를 빈번히 사고 팔게 됐다. 결국 오사카에는 선납 수표만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전문 환전상인까지 등장했다. 즉 오사카는 아시아 최초의 선물거래소였던 것이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박정호 aijen@kdi.re.kr


< 경제 용어 풀이 >

▨ 파생상품

채권, 통화, 주식 등 다른 대상의 가격 변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금융상품을 파생상품이라고 말한다. 파생상품의 가격 변동에 영향을 미치는 대상을 기초자산이라 하는데, 주식, 채권, 통화와 같은 금융자산이나 농산물, 축산물 등과 같은 실물자산이 기초자산에 해당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연, 환경, 경제현상을 기초자산으로 해 가격이 변동하는 다양한 파생상품이 출현하고 있다.

▨ 선물거래

미래의 특정시점(만기일)에 수량·규격이 표준화된 상품이나 금융 자산을 약속된 가격에 인수하거나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거래를 말한다. 선물거래는 거래 당사자 간 자유롭게 거래를 채결하는 선도거래와 달리 거래 방식이 규격화돼 있는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