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애덤스-토머스 제퍼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불가분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
미국 독립선언문 2장의 첫 구절이다. 인간의 평등, 기본적 인권을 강조한 이 선언서는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초고를 작성했다. 이후 존 애덤스(1735~1826)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에 의해 수정된 뒤 세상에 공개됐다.
애덤스와 제퍼슨은 이처럼 처음에 동지로 만났다. 독립 이후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미국을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정적관계로 서로를 외면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연방제 고수에 대한 애정은 같았다. 두 사람의 정치적 행보를 추적해보면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중앙집권 정부 vs 국민의 자유
애덤스는 미국 초대 부통령과 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대륙회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이 됐다. 그가 1776년 쓴 ‘정부론(Thoughts On Government)’은 미국 정치사상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서로 다른 국가기관이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 이 책은 미국 양원제 의회와 권력 분립의 토대가 됐다.
제퍼슨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윌리엄앤드메리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밀었다. 1776년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미국 독립 후 초대 국무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제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특히 프랭클린과 더불어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폭넓은 재능을 가진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법률가·건축가·과학자·고고학자·외교관·음악가 등 다양한 직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독립 이후 미국의 정체성과 발전 이념을 놓고 극명하게 대립했다. 애덤스는 상공업의 발전에서 미래를 찾았다. 신생 국가인 미국을 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앙집권적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덤스의 생각은 당시 ‘연방파(Federalists)’의 이해관계와 맞았다. 연방파는 미국 동·북부 해안지대에 기반을 둔 자본가들과 금융업계 채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친영국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반면 제퍼슨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연방제 유지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정부, 강한 군대보다는 최소한의 방위에 필요한 작은 군대, 상공업 진흥보다는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제퍼슨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화파(Republicans)’라고 불렸고 친프랑스적 성향을 가졌다.
연방파와 공화파의 등장은 미국에 정당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은 “특정 외국을 지지하는 도당이 판치는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 그 국가의 노예”라며 정당의 해악을 경고했지만 정당 조직의 확장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 교대로 대통령 차지 … 갈등 심화
두 사람의 충돌은 1796년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 본격화됐다. 부통령으로 뽑힌 제퍼슨이 대통령 애덤스를 도와주기는커녕 정부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첫 번째 승자는 애덤스였다. 1797년 미국과 프랑스를 전쟁 직전까지 몰고간 ‘XYZ사건’이 계기였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군대를 파견했음에도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이 중립을 선언한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급기야 영국 물품을 운송하는 미국 상선을 나포하겠다는 선언까지 하게 됐다. 결국 애덤스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특사 3명을 프랑스에 파견해 독립전쟁 당시 미국과 프랑스가 맺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협상 직전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드 탈레랑이 막대한 뇌물을 요구했고 애덤스가 이를 폭로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미국민들은 프랑스에 크게 분노했고 제퍼슨을 포함한 친 프랑스 성향의 공화파는 역풍을 맞게 됐다.
애덤스와 연방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파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을 방편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진 법이 선동방지법(Sedition Acts)이다. 이 법은 연방정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선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연방정부에 부여했다. 세부 규정은 애매해 사실상 연방정부에 반대하는 어떤 사람이든 억압할 수 있는 법이 됐다. 수십명의 언론인이 이 법에 따라 기소됐다.
하지만 이 선동방지법이 제퍼슨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연방파의 탄압을 받아온 공화파가 결속해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몰표를 줬기 때문이다.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공화파가 정권을 잡게 됐다. 제퍼슨은 이 선거를 ‘1800년 혁명’이라고 불렀다. 애덤스는 제퍼슨 취임식에 참석하지도 않은 채 워싱턴을 떠났다.
애덤스가 호락호락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임기 막바지에 연방파 지도자인 존 마셜을 연방 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이다. 1801년엔 법원 조직법을 개정해 판사직을 종신직으로 만들기도 했다. 마셜은 애덤스의 기대를 100% 충족시켰다. 그는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 판결에서 “대법원은 의회가 제정한 법이 헌법에 맞는지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선언, 제퍼슨 행정부 견제를 본격화했다. 이 판결은 이후 대법원이 대통령과 의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됐다. 마셜은 1835년 사망 때까지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사법부의 위상을 크게 올려놨다.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서로를 견제하는 3권 분립의 토대는 이때 닦였다.
●화해후 14년간 서신교환
선거에서 인신공격이 난무하던 시대였고 두 사람이 받은 상처는 컸다. 오랫동안 서로 교류없이 지내는 세월이 이어졌다. 하지만 1812년 1월1일, 애덤스가 제퍼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 회복의 전기가 마련됐다. 애덤스는 이 편지에서 ‘자네와 나는 서로를 이해시킬 때까지 죽어서는 안 되네’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사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구축한 미 연방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사망하기 전까지 14년 동안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정치 철학 문학 등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서 여전히 서로에 대한 비판의 눈길은 거두지 않았다. 당시 편지를 보면 제퍼슨은 1800년 대통령 선거를 회상하면서 공화파를 ‘개혁 주창자’, 연방파를 ‘개혁의 적’이라고 써놓았다.
또 두 사람이 정적이 된 이유, 관직을 둘러싸고 경쟁하게 된 이유 등 당시 정치 상황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미국 현대정치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두 건국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기념 50주년이었던 1826년 7월4일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애덤스가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는데…”였다. 하지만 사실 제퍼슨은 그보다 몇 시간 앞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제퍼슨은 죽기 전 묘비명에 쓸 문구를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 잠들다”라고 정했다. 그의 수많은 업적 중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빠져 있었다.
김동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3code@hankyung.com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불가분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
미국 독립선언문 2장의 첫 구절이다. 인간의 평등, 기본적 인권을 강조한 이 선언서는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초고를 작성했다. 이후 존 애덤스(1735~1826)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에 의해 수정된 뒤 세상에 공개됐다.
애덤스와 제퍼슨은 이처럼 처음에 동지로 만났다. 독립 이후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미국을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정적관계로 서로를 외면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연방제 고수에 대한 애정은 같았다. 두 사람의 정치적 행보를 추적해보면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중앙집권 정부 vs 국민의 자유
애덤스는 미국 초대 부통령과 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대륙회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이 됐다. 그가 1776년 쓴 ‘정부론(Thoughts On Government)’은 미국 정치사상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서로 다른 국가기관이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 이 책은 미국 양원제 의회와 권력 분립의 토대가 됐다.
제퍼슨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윌리엄앤드메리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밀었다. 1776년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미국 독립 후 초대 국무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제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특히 프랭클린과 더불어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폭넓은 재능을 가진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법률가·건축가·과학자·고고학자·외교관·음악가 등 다양한 직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독립 이후 미국의 정체성과 발전 이념을 놓고 극명하게 대립했다. 애덤스는 상공업의 발전에서 미래를 찾았다. 신생 국가인 미국을 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앙집권적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덤스의 생각은 당시 ‘연방파(Federalists)’의 이해관계와 맞았다. 연방파는 미국 동·북부 해안지대에 기반을 둔 자본가들과 금융업계 채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친영국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반면 제퍼슨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연방제 유지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정부, 강한 군대보다는 최소한의 방위에 필요한 작은 군대, 상공업 진흥보다는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제퍼슨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화파(Republicans)’라고 불렸고 친프랑스적 성향을 가졌다.
연방파와 공화파의 등장은 미국에 정당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은 “특정 외국을 지지하는 도당이 판치는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 그 국가의 노예”라며 정당의 해악을 경고했지만 정당 조직의 확장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 교대로 대통령 차지 … 갈등 심화
두 사람의 충돌은 1796년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 본격화됐다. 부통령으로 뽑힌 제퍼슨이 대통령 애덤스를 도와주기는커녕 정부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첫 번째 승자는 애덤스였다. 1797년 미국과 프랑스를 전쟁 직전까지 몰고간 ‘XYZ사건’이 계기였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군대를 파견했음에도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이 중립을 선언한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급기야 영국 물품을 운송하는 미국 상선을 나포하겠다는 선언까지 하게 됐다. 결국 애덤스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특사 3명을 프랑스에 파견해 독립전쟁 당시 미국과 프랑스가 맺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협상 직전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드 탈레랑이 막대한 뇌물을 요구했고 애덤스가 이를 폭로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미국민들은 프랑스에 크게 분노했고 제퍼슨을 포함한 친 프랑스 성향의 공화파는 역풍을 맞게 됐다.
애덤스와 연방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파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을 방편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진 법이 선동방지법(Sedition Acts)이다. 이 법은 연방정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선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연방정부에 부여했다. 세부 규정은 애매해 사실상 연방정부에 반대하는 어떤 사람이든 억압할 수 있는 법이 됐다. 수십명의 언론인이 이 법에 따라 기소됐다.
하지만 이 선동방지법이 제퍼슨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연방파의 탄압을 받아온 공화파가 결속해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몰표를 줬기 때문이다.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공화파가 정권을 잡게 됐다. 제퍼슨은 이 선거를 ‘1800년 혁명’이라고 불렀다. 애덤스는 제퍼슨 취임식에 참석하지도 않은 채 워싱턴을 떠났다.
애덤스가 호락호락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임기 막바지에 연방파 지도자인 존 마셜을 연방 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이다. 1801년엔 법원 조직법을 개정해 판사직을 종신직으로 만들기도 했다. 마셜은 애덤스의 기대를 100% 충족시켰다. 그는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 판결에서 “대법원은 의회가 제정한 법이 헌법에 맞는지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선언, 제퍼슨 행정부 견제를 본격화했다. 이 판결은 이후 대법원이 대통령과 의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됐다. 마셜은 1835년 사망 때까지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사법부의 위상을 크게 올려놨다.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서로를 견제하는 3권 분립의 토대는 이때 닦였다.
●화해후 14년간 서신교환
선거에서 인신공격이 난무하던 시대였고 두 사람이 받은 상처는 컸다. 오랫동안 서로 교류없이 지내는 세월이 이어졌다. 하지만 1812년 1월1일, 애덤스가 제퍼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 회복의 전기가 마련됐다. 애덤스는 이 편지에서 ‘자네와 나는 서로를 이해시킬 때까지 죽어서는 안 되네’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사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구축한 미 연방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사망하기 전까지 14년 동안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정치 철학 문학 등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서 여전히 서로에 대한 비판의 눈길은 거두지 않았다. 당시 편지를 보면 제퍼슨은 1800년 대통령 선거를 회상하면서 공화파를 ‘개혁 주창자’, 연방파를 ‘개혁의 적’이라고 써놓았다.
또 두 사람이 정적이 된 이유, 관직을 둘러싸고 경쟁하게 된 이유 등 당시 정치 상황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미국 현대정치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두 건국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기념 50주년이었던 1826년 7월4일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애덤스가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는데…”였다. 하지만 사실 제퍼슨은 그보다 몇 시간 앞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제퍼슨은 죽기 전 묘비명에 쓸 문구를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 잠들다”라고 정했다. 그의 수많은 업적 중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빠져 있었다.
김동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