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긴축을 포기하고 있다. 경제정책 기조를 성장으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데다 프랑스 영국 그리스 등 각국 선거에서 긴축 반대 여론이 확인됐다. 재정위기 해법으로 택했던 긴축기조가 위태로워졌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올리 렌 EU 집행위원회 경제·통화 담당 위원은 최근 벨기에 브뤼셀 본부에서 한 연설에서 “신재정협약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 등 공공지출 축소로 경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는 국가에 한정해서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사실상 긴축 중심의 신재정협약을 대폭 손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 대선을 비롯해 그리스 영국 등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긴축에 반대하는 세력이 힘을 얻으면서 정책 기조 전환에 속도가 붙고 있다.

#유럽 "긴축 더이상 못참아"


유럽 국가들은 긴축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입장이다. 기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장관은 최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신재정협약에 성장 조약을 추가하는 작업에 신속히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발언은 최근 EU 정책 결정자들이 잇따라 성장을 강조하고 나선 연장선상에 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달 말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성장 협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고, 장 클로드 융커 유로존 재무장관회의 의장도 최근 긴축정책 수정을 요구했다.

유럽 각국도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엘리오 디루포 벨기에 총리(사회당)와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보수당)는 “올랑드와 함께 유럽의 이익을 위해 더 많은 성장을 위한 계획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긴축정책 폐기의 선봉에는 프랑스가 설 것으로 보인다. 올랑드 당선자는 승리가 확정된 후 “이것은 유럽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유럽 재정위기의 해법으로 ‘긴축 대신 성장’을 주장한 그의 당선이 프랑스만의 이슈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시장은 현재 독일이 주도하는 EU의 긴축중심 경제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올랑드의 주도로 ‘성장’ 중심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지만 유럽의 ‘돈줄’인 독일과 프랑스가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진단도 만만찮다.

[Global Issue] 유럽, 성장으로 U턴…유로존 위기해법 다시 시험대에

#독일, 나홀로 긴축?


유럽이 잇따라 방향을 선회할 모습을 보이자 긴축을 주도했던 독일은 난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올랑드 당선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신재정협약은 25개국에 의해 추인된 것”이라며 “재협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독일의 입장이자 나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올랑드의 재정협약 재협상을 거부한 셈이다.

하지만 유럽 여론은 올랑드를 지지하고 있다. 2010년 5월2일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이 1100억유로의 그리스 구제금융 집행을 결정한 이후 2년 동안 유로존에서 10개 국가의 정권이 바뀌었다. 덴마크 등 다수 국가에서 긴축 반대파가 승리했다.

다음달 프랑스 총선에서도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등 좌파연합이 긴축을 지지하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중도우파 대중운동연합을 이길 것으로 현지 언론은 전망하고 있다. 올랑드의 정책 추진이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독일 일간지 디벨트는 “유럽 제2의 경제대국을 이끌게 된 올랑드가 독일의 정책기조에 반대하는 다른 국가들의 ‘대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메르켈-올랑드 공조가 변수


문제는 독일에서도 긴축 처방이 통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달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긴축안 부결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사르코지 대통령까지 낙마했다. 긴축을 지지하던 주요 파트너를 잃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은 같은날 치러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州) 지방선거에서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에 패배했다.

지지 기반이 약해진 독일 정부는 성장을 외치는 올랑드에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은 올랑드의 당선이 확정되자 “성장 협약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작업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절충점을 찾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임기훈 한국경제신문기자 shagg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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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드는 국수주의… 흔들리는 유럽통합

경제가 어려워지자 유럽 각국에 국수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최근 각국에서 잇따라 치러지고 있는 선거에서 극우파와 극좌파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가장 뚜렷한 징후로는 우선 유럽 통합의 근간 중 하나인 솅겐조약을 유지하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을 들 수 있다. 솅겐조약은 유럽 역내에서 자유로운 노동력의 이동을 보장한 것으로 유럽 26개국이 가입해 있다.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극우파 표를 잡기 위해 솅겐조약 탈퇴 가능성을 제기한 데 이어 실제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양대 강국 프랑스와 독일이 국경에서 불법 이민자에 대한 검문작업을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스페인은 최근 프랑스 국경과 주요 공항에서 한시적으로 검문활동을 재개하면서 솅겐조약에 타격을 줬다. 여기에 동유럽 루마니아가 솅겐조약에 추가 가입하려는 시도에 대해 네덜란드가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프랑스 대선을 계기로 유럽 통합의 이념은 빛이 바래고 각국 간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도권 밖의 소수 과격파로 치부되던 극우·극좌파의 의회 진출도 현실화되고 있다. “불법 이민자들의 유입을 막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 국경에 지뢰를 설치하겠다”는 등의 과격한 공약을 내건 그리스 극우정당 황금새벽당은 약 8%대의 득표를 하며 의석 21석을 따냈다. 급진좌파연합 정당인 시리자가 약진하면서 그리스 연정은 위기에 빠졌다. 이런 현상은 유럽 재정위기가 현실화된 이후 더 심해졌다. 작년엔 핀란드에서 극우정당인 ‘진짜 핀란드인’이 약진했고 2010년 헝가리 총선에서는 극우정당인 요비크가 원내 3당으로 부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