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니니-푸르트벵글러

1804년에 작곡된 베토벤 교향곡 제3번의 부제 ‘영웅’은 누구를 칭할까.

혹자는 같은 해 프랑스 황제 자리에 오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유럽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나 베니토 무솔리니를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 초 세계적 마에스트로(명지휘자)로 군림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한마디로 이 논란을 정리했다. “내게 영웅은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 뿐이다.” 알레그로 콘 브리오는 악보에서 사용되는 ‘빠르고 힘차게’란 뜻의 빠르기말로 영웅의 시작 부분의 연주템포다.

토스카니니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악보를 우선시했던 음악적 성향 때문이다. 그에게 훌륭한 지휘란 원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구현하는 일이었다.

반면 동시대의 라이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생각은 달랐다. 곡에 의미를 입히는 재창조가 후대 음악가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1947년 그가 베를린필하모닉을 이끌고 지휘한 영웅교향곡은 깊은 음색과 풍부한 화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휘가 끝난 뒤 대부분의 청중들은 바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어낸 영웅’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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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핍의 독학 vs 부유한 독학

토스카니니는 1867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 파르마음악원에 입학해 첼로를 배우면서 독학으로 지휘를 익혔다. 처음에 담임을 맡았던 여선생은 그의 비상한 암기력과 뛰어난 음악성을 발견하고 전액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토스카니니는 고집이 세서 음악원과 잦은 충돌을 빚기도 했다. 한 번은 교사에게 대들었다가 독방에 갇힌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첼로를 변기 대용으로 쓴 적도 있었다.

토스카니니는 1886년 우연한 기회에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승승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지휘자로 유럽투어에 성공했고 1926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었다. 1937년 뉴욕 필에서 은퇴한 뒤엔 NBC오케스트라를 맡아 세계 굴지의 악단으로 성장시켰다.

1886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푸르트벵글러는 아버지가 유명한 고고학자이자 교수였다. 부모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대신 집에서 철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스스로 공부를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은 악보 이면의 음악세계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푸르트벵글러 지휘법의 기반이 됐다.

푸르트벵글러는 1905년 독일 뮌헨에서 견습 지휘자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911년 뤼벡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정식 데뷔해 성공가도를 달리며 1922년엔 베를린 필을 이끌기 시작했다. 푸르트벵글러의 명성은 30대에 이미 세계적 지휘자의 반열에 올랐다. 1927년엔 빈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에 임명되고 바이로이트 음악제 총감독까지 석권했다.

● 천재적 암기력 vs 자유로운 해석

두 마에스트로는 20세기 전반 클래식계를 양분했다. 하지만 지휘 스타일은 확연히 달랐다. 토스카니니는 작곡가의 의도를,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자의 해석을 중시했다.

악보를 중시했던 토스카니니는 외우는 데도 능했다. 지휘자로 입문하게 된 계기는 1886년 첼리스트로 브라질 투어에 나섰을 때였다. 당시 지휘자의 실수로 ‘대타’를 찾던 중 악보를 다 외우고 있던 그가 나서게 된 것.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토스카니니는 정식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1898년 토리노에선 43회의 연주회를 전부 암보로 지휘하며 청중들을 압도했다. 토스카니니는 ‘표현’이라는 명분 아래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지휘자들을 비판했다. 리허설을 할 때마다 토스카니니의 고함소리가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기서 ‘포르티시모(매우 세게)’를 원하는 건 내가 아니야. 바로 베토벤이라고!”

하지만 열아홉 살이나 어렸던 푸르트벵글러는 토스카니니의 스타일을 ‘박자 맞추기 지휘’라고 평가절하했다. 악보를 읽는 것을 넘어 시대의 분위기와 지휘자의 철학까지 음악에 녹여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토스카니니가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야 한다”고 하자 푸르트벵글러는 “나는 악보 뒤에 숨어 있는 음표들을 찾고 있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는 “악보에 충실한 연주는 상상력 결핍의 표시”라며 “지휘란 자유로운 창조”라고 주장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박자를 센다기보다 멜로디의 선을 그리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흘러가는 강물’에 자주 비유했다. 교향악을 음향을 통해 구현되는 자연이라고 봤다. 이에 대해 1954년 영국언론 맨체스터 가디언에선 이렇게 적었다. “그는 악보를 마지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직관과 영감으로 새롭게 구현한다. 푸르트벵글러처럼 위대한 해석자는 없다.”

●'독재자'vs 얼간이'

작곡가의 의도를 치밀하게 파고들었던 토스카니니는 그만큼 단원들을 들볶았다. 어설픈 음이 나오면 “노(No)!”라고 호통을 치기 일쑤여서 단원들은 그를 ‘토스카노노’라 불렀다. 실수를 한 단원들에겐 ‘저능아’ ‘돼지’ 라는 욕설이 가차없이 퍼부어졌다. 토스카니니는 화가 날 때 부러뜨리기 위해서 47㎝의 긴 지휘봉을 애용했다. 가끔씩 값비싼 회중시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나중엔 아예 값싼 시계 몇 개를 화풀이용으로 준비했다.

한 치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았던 토스카니니와 달리 푸르트벵글러는 연습시간 배분에 서툴기로 유명했다. 연습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연주회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다. 녹음을 할 때도 부분 수정에 익숙하지 못했다. 때론 셔츠의 단추를 잘못 끼워 웃음거리가 됐다. 소프라노 마리아 슈타더는 푸르트벵글러를 ‘세상사에 어두운 얼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볼썽사나운 지휘 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지휘봉을 이리저리 흔들기만 해서 어느 동작에서 연주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애를 먹는 단원들도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존경과 질투가 뒤섞인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30대 푸르트벵글러가 겨우 자리를 잡았을 때 토스카니니는 이미 50대 최전성기의 지휘자였다. 토스카니니는 후배 푸르트벵글러를 ‘남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자리에 푸르트벵글러를 추천했던 것도 그였다.

반면 푸르트벵글러에게 토스카니니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선배였다. 1927년 푸르트벵글러의 뉴욕 데뷔 때였다. 푸르트벵글러는 혼신의 지휘를 펼쳤지만 뉴욕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 해 전에 미국에 진출했던 토스카니니가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한 푸르트벵글러는 “토스카니니가 뒤에서 내 험담을 하고 다닌 게 틀림없다”고 투덜댔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모차르트 페스티벌 때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원래 작은 음악회로 시작한 이 페스티벌은 1936년 토스카니니가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국제적 행사로 발돋움했다. 재미있는 것은 푸르트벵글러의 태도. 그는 이전에 페스티벌의 초대를 여러 번 받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해왔다. 그런데 토스카니니가 나서자 자신도 참가 의사를 밝혔다. 그러다가 1938년 이후 토스카니니가 참가를 중단하자 푸르트벵글러도 이내 페스티벌을 떠나버렸다.

고은이 한국경제신문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