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영화감독 알폰소 아라우의 1995년 작품 ‘구름 속의 산책‘은 아름다운 포도농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주인공 남녀(폴과 빅토리아)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 영화다. 포도농장은 단순한 영화의 공간적 장치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확인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서리가 내린 새벽의 포도밭에서 펼쳐지는 장면이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어느날 새벽 포도농장에 갑작스레 서리가 내린다. 농장의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농장 여기저기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부채로 따뜻한 바람을 포도나무에 전달하기 바쁘다. 폴과 빅토리아도 부채질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한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장면이 아마도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부채질을 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흡사 커다란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면이다. 서리는 포도뿐만 아니라 농작물에 있어 가장 무서운 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서리가 자칫 작물에 냉해라도 입히는 날이면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칠 수도 있다. 또한 이럴 경우 농산물 공급에 차질이 생겨 시장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재화의 공급에 시차가 발생하면 거미줄이 생긴다?

서리가 반갑지 않은 이유

물론 영화의 한 장면을 두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농산물의 공급 차질이 가격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시장의 반응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배추를 예로 들어보자. 배추는 김치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재료이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배추는 품종과 재배 기간, 시기에 따라 시장에 연중 공급되고 있다. 하지만 생육에 2~3개월가량이 소요되는 관계로, 통상적으로 3월과 6월 그리고 9월과 11월에 걸쳐 연중 4차례 집중적으로 출하된다. 바꿔 말하면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짧은 기간 안에 수급을 조절하기가 어렵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배추의 공급량이 시장의 수요량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균형 상태에 놓여 있던 배추의 시장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기 십상이다. 공산품은 생산 라인이나 인력을 추가로 투입하여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지만 농산물은 파종과 수확에 걸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공급을 확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공산품은 공급의 가격탄력성이 큰 데 반하여 농산물은 탄력성이 공산품에 비해 작다.

또 김치는 우리 식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어서 배추는 생필품이나 마찬가지다. 생필품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재화는 사치품과는 달리 가격이 상승하여도 수요량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다. 사치품은 가격의 변화에 대해 수요량의 변화가 탄력적인 반면, 농산물 등 생필품은 비탄력적이다. 따라서 배추는 가격에 대해 공급과 수요 모두 비탄력적이고,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가격이 급등하게 되는 것이다.

공급 부족으로 인한 시장 충격

더욱 큰 문제는 공급 부족으로 인한 시장의 충격이 배추 값의 급등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부들이 어떤 작물을 기를 것인가는 당시의 농산물 가격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 다른 농부들의 선택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재배 식물을 결정하는 기준은 현재의 가격만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배추 가격이 급등한 현시점에서 많은 농부들이 배추 농사를 결심하게 되기가 쉽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전국의 배추 제배면적이 확대되어 다음번 수확기에는 공급량이 수요량을 초과하게 되고, 이로 인해 배추 값은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이제 낮은 가격에서는 배추 재배의 경제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므로 다른 작물을 수확하려는 농부들이 증가할 것이다. 이에 따라 공급량이 감소하고 시장에서는 초과수요가 발생하여 가격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배추의 재배 주기에 따라 가격이 널뛰기 양상을 보이는 형국이다. 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거미집이론(Cobweb Theorem)’이라고 한다. 시간에 따라 널뛰기 양상을 보이는 배추의 가격 변동을 공급과 수요곡선의 평면에 그려보면 그 모습이 마치 거미집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미집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전제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선 배추와 같이 재화를 생산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어야 한다. 또한 농산물과 같이 공급자는 과거의 가격을 기준으로, 수요자는 현재의 가격을 기준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공급량과 수요량이 일치해 재고가 쌓이지 않아야 하며, 교역을 통한 해당 재화의 대체가 불가능해야 한다.

최근 몇 년간의 배추 가격의 흐름을 살펴보면 폭등과 폭락이 반복하여 발생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거미집이론이 단순히 책 속의 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배추 값이 급등하면 그때마다 시장에서는 배추 파동이 발생하고, 급락 현상이 나타나면 농부들은 애써 키운 배추를 갈아엎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정한 주기를 두고 피해를 주고받고 있는 셈이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재화의 공급에 시차가 발생하면 거미줄이 생긴다?
수급 균형의 묘책 없을까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을 보면, 마지막에 화재로 인해 농장의 모든 포도나무가 전소되고 만다. 하지만 종자나무의 뿌리가 살아남아 포도농장을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된다. 우리에게도 종자나무의 뿌리가 필요하다.

배추 가격의 주기적인 급등락을 방지하고 수급의 균형을 가져다줄 묘책이 하루속히 강구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원식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경제 용어 풀이 ☞ 거미집 이론

재화의 가격 변동에 대해 수요와 공급이 시차를 두고 반응함으로써 해당 재화의 가격에 급등과 급락이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거미집이론은 재화의 생산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소요되는 농산물과 부동산시장 등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재화의 공급에 시차가 발생하면 거미줄이 생긴다?
그림에서 현재의 배추가격이 P1이라고 하자. 농부들은 현재의 가격이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하는 균형가격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생산량을 Q2로 줄이려 할 것이다. 그러면 시장에는 초과수요가 발생하여 가격은 P2로 급등하게 된다. 이제 농부들은 상승한 가격에 반응하여 배추의 제배면적을 늘리기로 결심하고 Q3만큼을 시장에 공급한다.

하지만 이제는 시장의 수요가 공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여 가격은 P3로 급락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가격은 점점 균형가격 P*로 수렴하게 된다.

위와 같이 재화의 가격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균형가격으로 수렴하는 이유는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공급의 가격탄력성보다 크기 때문이다. 만약 공급의 가격탄력성이 수요의 탄력성보다 크다면 반대로 재화의 가격은 균형가격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발산하게) 된다.

한편 공급과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같은 경우에는 가격이 순환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