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 니콜라 테슬라
[세기의 라이벌] 노력파 vs 타고난 천재…노벨상도 거부한 '까칠한 師弟'
전기 없이는 하루, 아니 몇 분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마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당연하게 전기를 쓰고 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과 ‘과학 천재’ 니콜라 테슬라가 인류에게 준 선물이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반대 성향을 갖고 있었다. 에디슨은 끊임없는 노력파였고 테슬라는 타고난 천재였다. 에디슨은 자본의 논리에 밝았던 반면 테슬라는 오직 발명에만 몰두했다. 에디슨은 직류 전력 시스템의 창시자이자 대변자였던 데 비해 테슬라는 교류 전력 시스템을 창시했다. 직류냐, 교류냐의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테슬라였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어렸을 때 에디슨 전기를 읽어봤을 것이다. 반면 테슬라는 에디슨의 명성 때문인지 유독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다. 그러나 과학계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몽상가와 사업가

테슬라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특이했다. 식사를 하기 전 음식의 부피를 재고 먹는가 하면 반짝이는 크리스털을 유독 좋아하면서도 여자들의 귀걸이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등 언어에도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10세 때 유럽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이후 크로아티아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중퇴하고 산속에서 1년간 요양했다. 1875년 오스트리아 종합기술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 형편으로 또 중퇴하고 독학을 시작했다.

벨이 발명한 전화가 유럽에 퍼지면서 전신국이 속속 들어서던 1881년 1월, 테슬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옮겨가 중앙전신국에 일자리를 얻었다. 여기서 그는 서로 다른 위상을 갖는 교류 전류에 의해 만들어지는 ‘회전 자장’의 원리를 발견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직류 모터에 있어야 하는 정류자가 필요없어 발전기 구조가 간단해진다. 에디슨과의 숙명적 대결은 이때 예고됐다.

에디슨은 테슬라와 달리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0대 초반부터 집이 있는 미시간주 포트 휴런과 디트로이트를 오가는 기차 안에서 간식 잡지 채소 등을 닥치는 대로 팔았다. 남북전쟁 당시 전황을 보도하는 신문 ‘그랜드 트렁크 헤럴드’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GE(제너럴일렉트릭)의 원형을 세운 사업가, 미국식 벤처기업인의 자질은 이때 형성됐다.

기차 안에서 사업에 몰두하던 에디슨은 15세 때 역장 아들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전신기사 경험을 쌓는다. 이후 1866년 켄터키주 루이빌로 옮겨 낮에는 전선작업, 밤에는 연구에 몰두하며 주경야독했다. 1869년 보스턴 웨스트유니언사에 사직서를 내고 전업 발명가의 길을 걸었다. 에디슨이 취득한 첫 특허는 전기투표기록기(1869년)다. 투표 결과를 빠르게 집계해주는 장치였으나 사회적 관심을 못 끌어 상업적 성공에는 실패했다. 이때부터 에디슨은 사업적으로 유망하지 않은 발명은 의미가 없다는 신념을 굳혔다.

[세기의 라이벌] 노력파 vs 타고난 천재…노벨상도 거부한 '까칠한 師弟'

●사형수까지 동원한 전류전쟁

테슬라는 1884년 6월 미국 뉴저지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에디슨과 처음 만났다. 에디슨의 전화회사 프랑스 파리지사에서 일하고 있던 테슬라의 재능을 현지 직원이 알아보고 에디슨에게 데려간 것. 미국은 마침 산업혁명기를 겪고 있던 터여서 폭증하는 전기설비 수요와 고장 처리 등을 할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에디슨이 만든 직류 발전소는 마을마다 설치돼 있었지만, 전압을 조절할 수 없어 고장과 화재가 잦았다. 교류와 달리 변압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에디슨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테슬라는 줄곧 품어왔던 교류 기술로 발전기를 재설계할 것을 제안했다. 발전기 효율이 높아진다는 말에 ‘사업가’ 에디슨은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완료 후 두 사람은 영원히 갈라섰다. 이유에 대해서는 양측의 엇갈린 주장이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테슬라는 에디슨이 약속했던 성공 보수 5만달러를 주지 않아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 반면 에디슨은 테슬라가 5만달러에 이 기술을 살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1887년 자신의 이름을 건 전기회사를 차린 테슬라는 교류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학계와 산업계에 퍼뜨려 나갔다. 웨스팅하우스는 발전소를 교류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며 테슬라와 계약을 체결했다.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에디슨은 전압이 바뀌는 교류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기로 죽인 동물을 담은 전단지를 살포하고, 특허권을 놓고 웨스팅하우스와 소송을 벌였다. 교류 전기의자로 사형을 집행하자며 여론몰이를 하고 실제 사형수를 상대로 집행을 강행한 사건은 당시 현지 언론 사이에 유명한 얘기다.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과 맞소송을 벌이며 교류의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국 1890년대 들어 테슬라의 교류를 적용한 수력발전소가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들어서면서 이 전쟁은 막을 내렸다.

●가장 미국적인 아이콘

에디슨의 왕성한 발명의 정점은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이뤄졌다. 그는 1879~1880년 1200시간 이상 빛을 발하는 백열전구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해 특허권을 취득했다. 에디슨의 특허는 무려 1000~15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전구실험 중 발견한 ‘에디슨 효과(도체나 반도체를 가열하면 전자가 밖으로 나오는 현상)’는 20세기 들어 진공관에 응용돼 전자공학의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는 없는 기술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선행 기술에 추가 연구를 통해 실용성과 상업성의 옷을 입히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면 백열전구도 사실 윌리엄 소여, 조지프 스완 등 에디슨보다 앞서 고안해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쓸 수 있는’ 전구를 만들어낸 사람은 에디슨이 유일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끝없는 노력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에디슨은 가장 미국적인 아이콘으로 추앙받고 있다.

●전자산업 발전에 공헌

하지만 테슬라는 죽을 때까지 발명을 계속하면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해 무성한 뒷말을 낳기도 했다. 그는 무선 전신 시스템을 개발해 원격 조종 보트를 선보이기도 하고, 번개의 성질에 천착해 지구가 큰 도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번개 창출 실험을 하다 실험실을 다 태워버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에 반해 후원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1891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전기 발진기와 기계식 진동자는 동기 무선통신 기술의 원형이 됐다.

1900년대 들어서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옮겨 무선전신 및 무선 에너지 전송 연구를 지속했으며 1917년 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는 군사적 목적의 레이더 개념을 창시했다. 자속 밀도를 나타내는 국제단위 T(테슬라)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IEEE(국제전기전자엔지니어협회) 니콜라 테슬라 상은 전기전자통신 분야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 중 하나로 여겨진다. 만약 그가 전류 전쟁에서 에디슨을 이기지 못했다면 우리는 집집마다 발전기를 둬야 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성 한국경제신문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