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을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그 사람의 ‘노동’이 각각 드러난다. 퇴근길 지하철에 피곤한 몸을 실은 채 졸고 있는 봉급 생활자, 지하철역 주변에 좌판을 벌여 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노점상,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스트레스를 풀라며 손짓하는 포장마차 주인까지. 일과 노동에 지친 이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는 과연 행복한가?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58) 경제학자의 노동과  철학자의 노동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에 관한 질문을 던지려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경제학에서 행복의 개념은 간단히 정의된다. 인간의 만족에 효용(utility)라는 이름을 붙이고, 효용이 가장 커질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효용을 무한대로 늘릴 수는 없다. 소득(income)과 정보(information)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소득과 정보라는 제약조건하에서 효용을 가장 크게 만드는 선택을 취함으로써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경제학이다.

효용을 키우기 위해서는 소득을 늘려야 한다.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수적이다. 경제학에서 바라보는 행복 추구의 딜레마는 여기서 생겨난다. 인간의 노동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만족이 줄어드는 ‘비재화(bads)’이기 때문이다. 각 경제주체는 즐거운 재화인 ‘여가(leisure)’를 희생하고 그 대가로 고통스러운 노동을 취함으로써 소득을 얻는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8시간을 일했다고 한다면, 경제학자는 18시간은 여가라는 재화를 취하고 8시간은 노동이라는 비재화를 소비했다고 바라본다.

고통을 감내하며 노동을 소비한 결과는 소득으로 나타난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효용이 커지고, 인간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노동과 소득은 서로 상충되는 관계인 셈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효용을 가장 크게 만들어주는 ‘노동’과 ‘소득’을 선택하는 과정이 각 경제 주체의 노동공급 함수다. 노동은 여가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가와 소득의 선택 문제로 나타난다.

그런데 노동은 빵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고통일까. 그렇다면 왜 ‘직업은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일까. 힘든 업무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짜릿함을 느껴본 적은 없는가?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취업에 성공했을 때 그토록 기쁜 이유가 단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안정적인 연금을 받는 노년층이 또다시 일을 찾아 노동시장에 등장하는 것일까? 연금이 부족해서인가?

필명 ‘알랭’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철학자 에밀 샤르티에가 쓴 《행복론》에는 경제학 전공자가 보기에 무시무시한 ‘노동의 즐거움’란 글이 등장한다. 샤르티에는 쓸모있는 일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일이란 “스스로 자유로이 선택”한 일이고, 그것은 곧 능력을 나타내는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음악가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고, 참된 정치가란 정치를 즐기는 사람이다”고 했다. 음악가에게는 음악 활동이 일이고, 정치가에게는 정치 활동이 일인데, 이것을 즐긴다면 일이 비재화가 아니란 이야기다. 경제학자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노동은 행복의 필요조건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러셀은 행복을 명확히 정의내리지 않는다. 대신 “무엇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지는가?”를 고민한 뒤에 “행복이 아직도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러셀에 따르면 인간은 권태, 죄의식, 피해망상증 때문에 불행하다. 그리고 열정, 사랑, 일, 노력과 체념이라는 요소가 행복을 정복하는 열쇠다. 러셀 역시 일(노동)이 행복을 정복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러셀은 대부분의 경우 일의 성공은 소득으로 측정되며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는 한 이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일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러셀에 다르면 일은 소득을 획득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명예와 사회적 인정을 얻는 통로다. 따라서 일은 소득 획득과 별개로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활동이다. 전업주부가 일을 가진 여성보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소득을 창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사노동이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가사노동의 가치를 가족과 사회가 인정해준다면 전업주부가 일하는 여성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심지어 매우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일이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권태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며, 지나친 여가의 소비는 권태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러셀에게도 일과 노동은 행복을 정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경제학이 전부가 아닌 증거

다시 경제학으로 돌아와보자. 경제학의 매력 중 하나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화(abstract)시켜서 분석하는 명쾌함이다. 인간은 효용 극대화를 위해 뛰어다니는 존재이며, 노동은 소득을 얻기 위해 여가를 희생하는 고통스러운 행위일 뿐이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58) 경제학자의 노동과  철학자의 노동
만약 알랭과 러셀의 주장과 같이 일과 노동이 그 자체로 만족을 증가시키는 재화라면 돈을 받고 노동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노동을 공급해야 하는 우스꽝스런 경제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심정적으로 두 철학자의 주장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경제학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며, 철학 등 다른 학문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차성훈 KDI 전문연구원 econcha@kdi.re.kr


☞ 경제 용어 풀이

▨ 노동공급(labor supply)

노동과 같이 소비함에 따라 효용이 감소하는 재화를 비재화(bads)라고 하며 노동공급은 노동이라는 비재화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인 재화(goods)의 선택 문제다. 그런데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여가(leisure)시간을 결정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노동공급을 여가와 소득이라는 두 재화 사이의 선택 문제로 나타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