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않는 임신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오·남용 우려 크고 생명경시 풍조 조장"

현재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사후(응급)피임약을 처방전 없이 그냥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다. 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정부가 사후피임약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보건복지부는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전환하면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 낙태를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사후피임약은 성관계를 가진 후 72시간 내에 복용해야 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피임효과는 줄어든다. 약은 배란이나 수정을 막고 수정 후에는 배아의 착상을 막는 효과가 있다. 그동안 약사회와 일부 시민단체들은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풀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오·남용과 윤리적인 문제 등을 제기하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아 지금까지 의사 처방하에서만 구입 가능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왔다.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알아본다.


찬성

여성계는 원치 않는 임신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처방전 없이 사후피임약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편이다. 김정숙 여성아동폭력피해 중앙지원단장은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됐을 때 10대 청소년의 오·남용 소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의도하지 않은 임신 등 1차적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접근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1차적으로 응급피임을 할 수 있도록 사후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캠페인 등을 통해 청소년들의 무분별한 성의식을 변화시킨다면 청소년들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낙태 자체가 금지돼 있는 상황에서 사후피임약까지도 자유롭게 살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이 불법 낙태와 무면허 시술 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여성의 건강에 더 큰 위협이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경실련은 “낙태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후피임약뿐인데 굳이 처방을 받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가까운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약사들이 철저히 피임약 복용지도를 하도록 정부에서 감독하면 부작용과 위험성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경신련 사회정책팀의 남은경 씨는 “낙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후피임약은 그나마 저소득층이나 청소년이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수단인 만큼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고 건강 측면에서 낙태 예방 수단이자 실천적 방안으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통해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사들 모임인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의 모임’은 지난해 사후피임약을 병원에서 직접 팔 수 있도록 하고 피임 상담 진료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청와대에 보내기도 했다.


반대

의료계 한편에서는 사후피임약은 그야말로 응급상황에서만 써야 하는데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할 경우 이를 마치 피임약의 한 종류로 잘못 인식되게 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박애별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피임생리연구회 위원은 “안전한 피임을 위해서는 사전에 정확한 피임지식을 갖춰야 한다”며 “응급피임약을 정상적인 피임의 한 종류로 인식하는 사고를 심어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여성건강 차원에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후피임약이 성관계 전에 복용하는 경구피임약에 비해 여성 호르몬 수치를 과도하게 조절해 몸에 무리를 주고 약에 대한 내성을 갖게 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는 것이다. 정호진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재무이사는 “피임약의 본 용도를 생각했을 때 사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유지돼야 한다”며 “성관계를 시도하는 연령대가 낮아지는 가운데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은 약의 오·남용만을 가져올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성범죄나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 음성적인 방법으로 응급피임약을 찾을 게 아니라 의료기관을 찾아 사후관리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일반약 전환을 주장하는 측은 응급피임약이 필요한 용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종교계 쪽에서도 무책임한 성관계를 오히려 조장할 수 있고 생명윤리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며 일반약 전환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다. 미래목회포럼(대표 정성진 목사)은 “사후피임약은 초기 인간 생명을 죽이는 문제를 야기시키며 그것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신앙적으로도 당연히 거부해야 할 사항”이라는 입장이다. 낙태반대운동연합도 “사후피임약 자유 판매는 준비되지 않은 임신과 불법적인 낙태를 고민하게 만들어 결국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생각하기

[시사이슈 찬반토론] 처방전 없는 사후 피임약 판매 괜찮을까요.
이 문제는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하기도 어렵다. 다른 나라 역시 처방전을 요구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로 갈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주마다 정책이 다르지만 식품의약국(FDA)은 사후피임약을 의사처방 없이 마트 등에서 팔되 18세 미만의 경우에는 처방전을 의무화한다는 기준을 정했다. 영국 캐나다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호주 스웨덴 등은 처방전이 필요 없지만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는 의사의 처방전을 요구한다.

나라마다 정책이 다른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답 역시 결코 쉽지 않으며 각 사회의 문화와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다. 사실 찬반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을 담고 있어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현실적인 필요성과 남용 가능성을 절충한다면 미국처럼 일정한 연령대를 정해 미성년에게는 처방전을 요구하고 성인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임신이나 원하지 않는 관계 등을 경험한 여성들이 부담 없이 상담할 수 있는 상담센터 등을 보건소 같은 곳에 많이 설치하는 것이다. 처방전이 필요한 어린 여성의 경우 이런 곳을 통해 의사와의 접견 등도 간편하게 이뤄질 수 있도로 제도화화면 여성의 건강도 지키고 불법 낙태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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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3월28일자 보도기사

정부가 사후피임약을 의사 처방 없이 구입 가능한 일반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후 72시간(3일) 안에 복용하면 약품 내 호르몬이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막아 임신 가능성을 낮춘다. 하지만 한 번 복용할 때 사전피임약의 10배에 달하는 호르몬이 한번에 가해지기 때문에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현행법상 사후피임약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전문약으로 분류돼 있다. 그동안 약사회와 일부 시민단체들은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풀어달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해왔다.

지난해 6월에는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진오비)’이 “사후피임약을 병원에서 직접 팔 수 있도록 하고, 피임 상담 진료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낙태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후피임약뿐인데, 굳이 처방을 받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가까운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약사들이 철저히 피임약 복용 지도를 하도록 정부에서 감독하면 부작용과 위험성을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전환하면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 낙태를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