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 - 록펠러
[세기의 라이벌] 철강왕 vs 석유왕…끝나지 않은 경영천재들의 기부경쟁
[세기의 라이벌] 철강왕 vs 석유왕…끝나지 않은 경영천재들의 기부경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이 있다. 1347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칼레시민의 목숨을 구한 귀족들의 희생정신이 담긴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라는 뜻으로, 최근에는 기업인들이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는 행위에도 종종 사용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경제를 이끈 대표적 기업인 앤드루 카네기와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각각 ‘철강왕’과 ‘석유왕’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사람의 인생역정은 매우 닮아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사업가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인생 말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자선사업을 벌였다. 경영수완이 출중한 기업가답게 자선에 있어서도 남다른 방식을 고수했다. 극빈자에게 직접 돈이나 음식을 지원하는 대신 교육기회와 장학금을 제공하고,빈곤국에는 식량보다는 수확률이 높은 종자와 비료를 줬다. 이는 빌 게이츠를 비롯해 뒤를 이은 수많은 자선 기업가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가난한 소년서 최고 부자로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한다. 학업 대신 방적공, 기관조수, 전보배달원, 전신기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는 1865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침대차와 유정사업 등에 투자해 큰 돈을 벌었다. 카네기를 재벌로 만든 것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강철이었다. 당시 철도교량들은 나무로 돼 있었는데 화재에 취약해 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였다. 1865년 철강 수요의 증가를 예견한 그는 철도회사를 그만두고 독자적으로 철강업체를 차렸다. 1872년 홈스테드제강소, 1892년에는 카네기철강회사를 각각 설립했다. 1901년 카네기는 이 회사를 JP모건의 창업자 존 피어폰트 모건이 운영하던 제강회사와 합병, 미국 전체 조강생산량의 약 65%를 지배하는 US스틸을 탄생시켰다.

록펠러의 유년시절도 넉넉하지는 않았다. 뉴욕주 리치퍼드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살던 그의 가족들은 사기꾼 약장수였던 아버지 때문에 종종 어려움에 처하곤 했다. 록펠러는 돈에 대해서라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고등학교 중퇴 후 1855년 첫 직장에 취직할 때까지 회계장부를 분신처럼 다뤘다. 얼마나 지독했던지 평생 1센트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미국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던 시기였던 1863년 클리블랜드에 정유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됐다. 1870년 스탠더드석유회사를 창립했고 1872년에는 클리블랜드에 있는 경쟁사 26개 중 22개를 단 6주 만에 흡수했다. 1882년 스탠더드오일과 계열사들을 통합하며 탄생한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주무르며 ‘완전 독점’ 체제를 이뤘다. 록펠러는 33세 때 백만장자, 43세에는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된다. 53세 때는 재산이 10억달러를 넘으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190조원, 빌 게이츠의 3배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냉혈자본가와 기부천사'두 얼굴'

젊은 시절 이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경쟁회사를 무너뜨리거나 합병하고 시장을 독점해 ‘부도덕한 독점재벌의 표본’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카네기는 철강왕이 된 후에도 근로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고 봉급을 삭감하면서 ‘미국 산업역사에 있어 가장 잔인한 수완가’로 묘사됐다.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파업을 강제 해산시키다 10여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한 1892년 ‘홈스테드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록펠러 역시 살인적인 노동력 착취와 저임금으로 악명이 높았다. 전미 광산노조가 주도한 쟁의에 민병대를 투입해 40여명을 숨지게 한 1913년 ‘러드로의 학살’은 지금도 록펠러 집안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인생 후반부에 와서 완벽한 환골탈태를 하게 된다. 카네기는 1901년 카네기철강회사를 JP모건에 넘기고 본격적으로 교육과 문화사업을 시작한다. 1902년 당시로선 천문학적 액수인 2500만달러를 기부해 공공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설립했다. 그 밖에도 카네기회관,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3억달러 이상을 기증했다. 그가 미국 전역에 지은 도서관만 2500개에 달한다.

세계 최대 갑부였던 록펠러는 55세에 알로페시아라는 불치병에 걸리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음식을 전혀 소화하지 못했으며 눈썹과 머리카락이 빠져갔고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때부터 나누는 삶을 실천했고 기적적으로 병도 사라졌다. 실제로 록펠러가 사망한 것은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후 무려 40여년이 지난 뒤였다. 그는 1911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가 반(反)트러스트법 위반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해산명령을 받으면서 자선사업을 본격화한다. 앞서 1890~1892년 시카고대 설립을 위해 6000만달러가량을 내놨던 그는 은퇴 후 사회사업에 총 3억5000만달러를 기부했다. 1913년에는 인류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록펠러재단을 세웠다. 기아근절, 인구문제 해결, 대학발전, 미국의 기회 균등과 문화발전,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원조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이 재단은 지금까지 20억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전 세계에 기부했다.

미국 기부문화의 초석 다지다

카네기와 록펠러에겐 자선도 하나의 사업이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기부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직접 지원보다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을 택했다. 카네기재단이 도서관 건립과 장학금 지원 등 교육분야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이유다. 록펠러재단 역시 아프리카에 음식물을 공급하는 게 아니라 생산량이 많은 종자와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비료를 개발·제공하는 쪽에 식량안전사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네기와 록펠러재단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각각 26억달러와 30억달러의 자산을 기반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카네기와 록펠러의 선행은 그 이후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쳐 헨리 포드를 포함해 게이츠, 워런 버핏 등의 거액기부로 이어지게 된다. 현재 세계 최대의 기부재단인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재단’ 역시 백신개발 사업과 도서관 건립 등 부자와 빈자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카네기와 록펠러의 인생 후반기는 미국 사회가 산업화 후유증으로 사회·정치적 갈등이 표면화된 20세기 초였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자선행위가 사회적 비판과 공격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면죄부’성 노력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본주의 체제의 새로운 기업가적 윤리기준을 제시하고, 자본주의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치유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카네기는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이란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재산을 안고 지구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명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유정 한국경제신문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