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코드 vs 슈렉 스타일… 敵으로 만난 '애니 파이터'
[세기의 라이벌] 아이스너 - 카젠버그
디즈니는 드림웍스의 라이벌이라기보다 선배였다. 알다시피 디즈니는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하면 디즈니였고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아동용 볼거리 및 캐릭터 시장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다 보니 디즈니 문법이라는 게 생겼고 디즈니 스타일이라는 게 생겼다. 디즈니 코드가 생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드림웍스의 ‘슈렉’은 이 디즈니 코드를 비틀어 만들어낸 2차 가공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가공품의 효력이 대단한 패러디 효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원본을 능가하는 패러디, ‘슈렉’의 출발은 그랬다. ‘슈렉’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를 충분히, 깊숙이 알고 있는 수제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처럼 디즈니를 깊이 있게 파헤쳐 그 문법을 뒤집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벅스 라이프 vs 개미

여기서 ‘슈렉’의 전략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못난이 괴물 슈렉은 “옛날 옛날에”라고 시작하는 동화책을 찢고 등장한다. 아름다운 공주는 폭력적인 데다 괴팍하고 이중적이다. 주인공인 피오나 공주 역시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왈가닥이며 독립적이기까지 하다. 왕자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수동적 공주의 모습을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디즈니를 이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그 문법을 뒤집은 자가 누구일까. 그는 1990년대 디즈니의 부활을 알려줬던 제프리 카젠버그였다. 디즈니의 수장이 어떻게 디즈니를 비꼬고 풍자하는 적수의 수장이 되었을까.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라이벌인 마이클 아이스너와 카젠버그의 전면전이 ‘슈렉’에서 절정을 이룬 셈이다.

카젠버그와 아이스너는 디즈니가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파라마운트에서 함께 스카우트한 인물이다. 카젠버그는 프로덕션 사장, 아이스너는 프로덕션 회장직을 각각 맡았다. 파라마운트 시절 아이스너는 정식 코스를 밟아 총괄사장이 됐지만 카젠버그는 우편물 담당 직원에서 제작 담당 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디즈니로 옮긴 두 사람은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등을 제작해 디즈니 제2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1994년 아이스너가 카젠버그를 돌연 해고했다. 당시 디즈니의 총괄사장이자 2인자인 프랭크 헬스가 헬기 사고로 사망한 후 최고경영자(CEO)였던 아이스너와 카젠버그의 관계에 불화가 생긴 것. 업계에서는 독불장군형 리더십으로 유명한 아이스너가 카젠버그를 밀어냈을 것으로 추측한다.

●디즈니의 문법 깬‘슈렉’

그러나 카젠버그는 즉각 데이비드 게펜,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20억달러를 모아 드림웍스를 설립했다. 그는 드림웍스를 디즈니를 능가하는 애니메이션 제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워낙 회사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카젠버그이기에 디즈니의 아이스너 CEO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독점해오던 만화영화 산업에 막강한 경쟁 상대가 출현한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아이스너가 2005년 CEO직을 로버트 아이거에게 물려주고 퇴임하기까지 11년간 지속된다.첫 번째 대결은 디즈니와 픽사의 합작품 ‘벅스 라이프’와 드림웍스의 ‘개미’로 실현된다. 두 작품은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세계관과 캐릭터를 선보인다. 둘 다 곤충을 소재로 삼았는데 주인공은 모두 개미였다. 중요한 점은 그것을 그려낸 관점이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벅스 라이프’는 자신이 속한 세계, 공동체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주인공 플릭이 결국 공동체를 구하고 악을 처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반면 드림웍스의 ‘개미’는 미완의 개인이 공동체에 귀속되는 이야기를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개미’의 세계는 평생 일만 해야 하는 일개미와 싸움 개미로 나뉘어져 있다. 그들은 선택권이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역할을 해나가야만 한다. 약간의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개미’는 사회의 구조를 계급적·계층적으로 해석한다. 적은 공동체 내부에 있고 시스템의 부조리 때문에 문제는 발생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캐릭터를 표현하는 그림의 양식이다. ‘벅스 라이프’가 동화적 캐릭터를 표현하는 그림체를 선택했다면 ‘개미’는 거의 실사에 가까우리만치 사실적인 그림을 선택했다. 결과는 아이스너의 ‘벅스 라이프’가 승리했다. 관객들은 징그럽도록 사실적인 곤충을 묘사한 그림체를 외면했고 지독하게 현실과 닮은 비판적 메시지에도 시큰둥했다. ‘벅스 라이프’는 추수감사절 주말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세우며 총 1억6300만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그러나 카젠버그는 ‘슈렉’으로 반격에 성공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주겠다는 그의 의지가 현실화된 것이다. ‘슈렉’은 2002년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한편 칸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원작은 윌리엄 스테이그의 동화다. 여기서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차별성이 보이는데 대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전래 동화나 민담을 원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전래 동화나 민담이 성장 서사를 기반으로 전형적 해피 엔딩의 구조를 가졌다면 애초 창작 동화인 ‘슈렉’은 동화와 민담의 문법을 거절하고 있다. ‘슈렉’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현재성과 현실성은 그런 점에서 원작에 영향받은 바 크다. ‘슈렉’은 ‘개미’와 마찬가지로 성우가 아닌 할리우드 배우들을 목소리 배우로 캐스팅했고 그들의 특징을 캐릭터에도 반영했다. 덕분에 ‘슈렉’은 아동이 아닌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패러디물로 인정받았다.

‘슈렉’은 패러디 소재로 디즈니와 디즈니 캐릭터를 이용했다. 파콰드 영주가 만든 둘락성은 디즈니랜드와 비슷하고 파콰드 영주는 디즈니와 공동 작업을 하던 픽사의 존 레스터와 닮았다. 이미 주류 대중문화로 부상했던 여러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관객들의 재미도 끌어올렸다. ‘심슨 가족’ ‘매트릭스’의 장면을 가져오는가 하면 WWF 레슬링을 끌어오기도 했다.

●토이 스토리3와 슈렉 포에버

드림웍스의 등장 이후 매년 여름과 겨울 성수기를 독식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장은 양분되기 시작했다. 매년 관객들은 디즈니와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을 비교하고 즐기길 기다린다. 드림웍스의 ‘엘도라도’에 맞서 디즈니의 ‘아틀란티스’가 개봉하고 ‘니모를 찾아서’와 ‘샤크’는 여전히 비교 대상이다. 생쥐의 요리 원정기인 ‘라따뚜이’는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는 아웃사이더의 문제를 그렸다는 점에서 디즈니답다. 세대 간 결합과 화해를 다루는 ‘업’ 역시 디즈니의 정서와 주제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애니메이션계가 스토리뿐만 아니라 세련된 3D(3차원) 기술력으로 평가받으면서 최근엔 ‘드래곤 길들이기’같은 드림웍스의 작품들이 주목받기도 했다.

지난해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디즈니의 대표작이라 할 ‘토이 스토리’가 3편으로 완결되고 ‘슈렉’도 마무리된다는 사실이었다. 1995년 11월22일 추수감사절 시즌에 개봉된 ‘토이 스토리’가 일으킨 신드롬은 대단했다. ‘토이 스토리’는 북미 시장에서 1억9200만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1995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1999년 발표된 ‘토이 스토리2’도 북미지역 박스오피스에서 2억4500만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흥행 1위에 올랐다. 속편이 전편 수익을 능가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슈렉’ 역시 드림웍스의 대표적 아이콘이다. 두 작품은 올해 나란히 마지막 편을 선보였고 이는 디즈니나 드림웍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회할 것에 대한 예고라고 볼 수도 있다.

아이스너와 카젠버그의 경쟁은 아이스너가 디즈니를 떠나고 새로운 CEO인 아이거가 스티브 잡스와 손을 잡으면서 다른 양상으로 바뀐다. 현재 픽사를 인수한 디즈니는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디즈니의 구현에 집중하고 있다. 드림웍스 역시 3D 애니메이션의 성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처럼 새로운 성장 서사를 만들어가듯이 말이다. 이 두 회사가 건재하는 한 우리는 매년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애니메이션을 꼬박꼬박 보게 될 듯하다.
[세기의 라이벌] 아이스너 - 카젠버그
강유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