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네트워크로 세상을 바꾼 제‘2의 잡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생전 “마크 저커버그를 대단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나 래리 페이지에 독설을 퍼부울 정도로 까다로운 잡스가 새파란 20대 청년에게 찬사를 보낸 것이다.
잡스의 전기(傳記)를 쓴 월터 아이잭슨은 “잡스는 매우 성마르고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했지만, 저커버그는 기업을 팔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만들어 가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했다”고 소개했다.
# 재산 21조원…세계 최연소 갑부
올해 스물일곱 살인 마크 저커버그는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의 CEO다.
페이스북은 가입자 수가 8억명에 달하며 지난 6월 월간 페이지뷰 1조를 돌파했다.
전 세계 인터넷 이용자의 46.9%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는 175억달러(21조원)의 재산을 모아 세계 최연소 갑부에 등극했다.
페이스북 기업공개(IPO)가 단행되면 저커버그의 재산은 훨씬 더 늘어난다.
페이스북의 시가총액이 1000억달러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저커버그는 2010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에 뽑혔다.
타임지는 “가면 무도회 같은 인터넷 세상을 바꿨으며 사이버 공간을 훨씬 더 현실과 가깝게 만들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정작 저커버그의 모습은 거대한 제국을 이끄는 황제라기보다 평범한 20대 미국 청년에 가깝다.
공식석상에서 후드 티에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던 일이나, 적록색맹이라 페이스북 로고를 푸른색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동거하고 있는 연인 프리실래 챈과 함께 동네 꼬마들에게 초코바를 나눠주는 사진이 올라 있다.
페이스북의 자유로운 소통은 저커버그가 추구하는 삶과 닮았다.
# 기숙사 방에서 탄생한 페이스북
뉴욕주에서 유대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저커버그는 13세에 유대교 성인식인 ‘바르 미츠바’까지 거쳤다.
저커버그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다.
그는 집과 부모가 운영하는 치과 사무실을 연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어린시절부터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다.
고등학생 때는 인텔리전트 미디어 그룹에 고용돼 인공지능 뮤직 플레이어 ‘시냅스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미국 최대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아메리카 온라인(AOL)이 시냅스 플레이어를 사들이고 어린 저커버그에게 정식 일자리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이를 거절하고 2002년 9월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그가 선택한 전공은 컴퓨터공학과 심리학이었다.
저커버그는 하버드대 2학년이던 2003년 10월 학교 기숙사를 해킹해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하는 웹사이트 ‘페이스매시’를 만들었다.
그의 당돌한 장난은 학교에 발각돼 하루 만에 폐쇄됐지만 하룻밤 사이 5000명이 몰려들었고 저커버그의 이름은 학교 전체로 퍼졌다.
이 사건으로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하는 윙클보스 형제를 만난다.
윙클보스 형제는 하버드 학생들의 데이트 사이트인 ‘하버드 커넥션’을 만들자고 제의한다.
저커버그는 이를 바탕으로 같은 대학 친구인 더스틴 모스코비츠, 크리스 휴즈와 함께 기숙사 방에서 하버드생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웹상에 올리고 공유하는 사이트인 ‘더페이스북(theFacebook)’을 만든다.
2004년 2월의 일이다.
같은 해 6월 저커버그는 1년 휴학계를 내고 페이스북의 근거지를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로 옮겨 일에만 매달렸다. 이후 하버드대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처럼 그는 대학을 중퇴했다.
# 창립 멤버들과 결별
‘자유로워야 한다. 단순해야 한다.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치 아래 설립된 더페이스북은 보름 만에 5000여명의 하버드생의 놀이터로 자리잡았다.
두 달 후에는 스탠퍼드, 예일, 컬럼비아 대학생까지 아우르면서 5만여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사이트로 성장했다.
이후 무료 음악파일 공유 프로그램인 ‘냅스터’의 창시자 숀 패닝이 합류하면서 그의 제안으로 ‘the’를 빼면서 오늘의 페이스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윙클보스 형제가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어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6500만달러를 주면서 지난한 법정 분쟁을 끝냈다.
초창기 멤버인 세이버린과 등을 돌리는 고통도 겪었다.
수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급성장을 거듭한 페이스북은 전 세계 5억명의 회원을 보유한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회사로 거듭났다.
지난해 저커버그는 작가 스티븐 레비와 가진 인터뷰에서 “뭔가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이를 깨뜨리는 것도 괜찮다”며 “이것이 오늘날 페이스북을 이끄는 발상이자 가장 중요한 내 개성”이라고 밝혔다.
# 뛰어난 인문학적 통찰력
저커버그는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풍부한 인문학 지식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대학 입시 원서에 영어 말고 읽고 쓸 줄 아는 언어로 프랑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를 꼽았을 정도로 서양 고전에 해박하다.
저커버그는 어린시절부터 그리스 로마신화를 탐독했다.
페이스북 본사 사무실 복도에는 ‘우리는 기술회사인가’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저커버그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기술을 완성한다고 본 것이다.
타임지는 그에 대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지 않으며 더욱 더 그 안으로 묻혀 버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깊은 통찰력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인이 된 잡스를 이을 정보기술(IT) 영웅으로 저커버그를 꼽았다. 잡스처럼 저커버그도 대학을 자퇴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지도 모르는 제품을 만들고 그것을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제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울러 완벽주의자이며 때로는 까칠하다.
저커버그가 잡스와 가장 닮은 점은 자신의 비전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
아이폰을 기획할 때 소비자들은 많은 버튼과 하나의 착탈식 배터리를 원했지만 잡스는 아이폰의 단순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리라 생각했고 이를 강행했다.
저커버그도 한 사람의 생각보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낫다는 ‘대중의 지혜’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동료를 잃기도 했다.
그는 페이스북이 유저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자신의 생각이 대중과 다르더라도 이를 밀어붙였다.
유저들이 언젠가 자신에게 감사하리라 확신한 것이다.
“나는 세계를 좀 더 열린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자기 소개글은 현실이 됐다. 20대 ‘포스트 잡스’의 세상 바꾸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생전 “마크 저커버그를 대단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나 래리 페이지에 독설을 퍼부울 정도로 까다로운 잡스가 새파란 20대 청년에게 찬사를 보낸 것이다.
잡스의 전기(傳記)를 쓴 월터 아이잭슨은 “잡스는 매우 성마르고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했지만, 저커버그는 기업을 팔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만들어 가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했다”고 소개했다.
# 재산 21조원…세계 최연소 갑부
올해 스물일곱 살인 마크 저커버그는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의 CEO다.
페이스북은 가입자 수가 8억명에 달하며 지난 6월 월간 페이지뷰 1조를 돌파했다.
전 세계 인터넷 이용자의 46.9%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는 175억달러(21조원)의 재산을 모아 세계 최연소 갑부에 등극했다.
페이스북 기업공개(IPO)가 단행되면 저커버그의 재산은 훨씬 더 늘어난다.
페이스북의 시가총액이 1000억달러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저커버그는 2010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에 뽑혔다.
타임지는 “가면 무도회 같은 인터넷 세상을 바꿨으며 사이버 공간을 훨씬 더 현실과 가깝게 만들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정작 저커버그의 모습은 거대한 제국을 이끄는 황제라기보다 평범한 20대 미국 청년에 가깝다.
공식석상에서 후드 티에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던 일이나, 적록색맹이라 페이스북 로고를 푸른색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동거하고 있는 연인 프리실래 챈과 함께 동네 꼬마들에게 초코바를 나눠주는 사진이 올라 있다.
페이스북의 자유로운 소통은 저커버그가 추구하는 삶과 닮았다.
# 기숙사 방에서 탄생한 페이스북
뉴욕주에서 유대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저커버그는 13세에 유대교 성인식인 ‘바르 미츠바’까지 거쳤다.
저커버그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다.
그는 집과 부모가 운영하는 치과 사무실을 연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어린시절부터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다.
고등학생 때는 인텔리전트 미디어 그룹에 고용돼 인공지능 뮤직 플레이어 ‘시냅스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미국 최대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아메리카 온라인(AOL)이 시냅스 플레이어를 사들이고 어린 저커버그에게 정식 일자리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이를 거절하고 2002년 9월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그가 선택한 전공은 컴퓨터공학과 심리학이었다.
저커버그는 하버드대 2학년이던 2003년 10월 학교 기숙사를 해킹해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하는 웹사이트 ‘페이스매시’를 만들었다.
그의 당돌한 장난은 학교에 발각돼 하루 만에 폐쇄됐지만 하룻밤 사이 5000명이 몰려들었고 저커버그의 이름은 학교 전체로 퍼졌다.
이 사건으로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하는 윙클보스 형제를 만난다.
윙클보스 형제는 하버드 학생들의 데이트 사이트인 ‘하버드 커넥션’을 만들자고 제의한다.
저커버그는 이를 바탕으로 같은 대학 친구인 더스틴 모스코비츠, 크리스 휴즈와 함께 기숙사 방에서 하버드생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웹상에 올리고 공유하는 사이트인 ‘더페이스북(theFacebook)’을 만든다.
2004년 2월의 일이다.
같은 해 6월 저커버그는 1년 휴학계를 내고 페이스북의 근거지를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로 옮겨 일에만 매달렸다. 이후 하버드대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처럼 그는 대학을 중퇴했다.
# 창립 멤버들과 결별
‘자유로워야 한다. 단순해야 한다.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치 아래 설립된 더페이스북은 보름 만에 5000여명의 하버드생의 놀이터로 자리잡았다.
두 달 후에는 스탠퍼드, 예일, 컬럼비아 대학생까지 아우르면서 5만여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사이트로 성장했다.
이후 무료 음악파일 공유 프로그램인 ‘냅스터’의 창시자 숀 패닝이 합류하면서 그의 제안으로 ‘the’를 빼면서 오늘의 페이스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윙클보스 형제가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어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6500만달러를 주면서 지난한 법정 분쟁을 끝냈다.
초창기 멤버인 세이버린과 등을 돌리는 고통도 겪었다.
수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급성장을 거듭한 페이스북은 전 세계 5억명의 회원을 보유한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회사로 거듭났다.
지난해 저커버그는 작가 스티븐 레비와 가진 인터뷰에서 “뭔가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이를 깨뜨리는 것도 괜찮다”며 “이것이 오늘날 페이스북을 이끄는 발상이자 가장 중요한 내 개성”이라고 밝혔다.
# 뛰어난 인문학적 통찰력
저커버그는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풍부한 인문학 지식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대학 입시 원서에 영어 말고 읽고 쓸 줄 아는 언어로 프랑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를 꼽았을 정도로 서양 고전에 해박하다.
저커버그는 어린시절부터 그리스 로마신화를 탐독했다.
페이스북 본사 사무실 복도에는 ‘우리는 기술회사인가’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저커버그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기술을 완성한다고 본 것이다.
타임지는 그에 대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지 않으며 더욱 더 그 안으로 묻혀 버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깊은 통찰력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인이 된 잡스를 이을 정보기술(IT) 영웅으로 저커버그를 꼽았다. 잡스처럼 저커버그도 대학을 자퇴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지도 모르는 제품을 만들고 그것을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제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울러 완벽주의자이며 때로는 까칠하다.
저커버그가 잡스와 가장 닮은 점은 자신의 비전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
아이폰을 기획할 때 소비자들은 많은 버튼과 하나의 착탈식 배터리를 원했지만 잡스는 아이폰의 단순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리라 생각했고 이를 강행했다.
저커버그도 한 사람의 생각보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낫다는 ‘대중의 지혜’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동료를 잃기도 했다.
그는 페이스북이 유저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자신의 생각이 대중과 다르더라도 이를 밀어붙였다.
유저들이 언젠가 자신에게 감사하리라 확신한 것이다.
“나는 세계를 좀 더 열린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자기 소개글은 현실이 됐다. 20대 ‘포스트 잡스’의 세상 바꾸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