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CEO 열전 ③
변대규 휴맥스 대표
변대규 휴맥스 대표이사 사장(52)은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기업인이다. 창업 20년만인 작년 매출 1조원을 돌파했고 그 중 95%가 수출인 점을 감안하면 ‘기적의 벤처인’ ‘국가대표 벤처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변 사장은 생글생글 독자에게 단 한가지를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고통을 통한 성장, 즉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는 것. “안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어려움에 도전하는 것이 자신의 역량을 높이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게 한다”고. 성공한 엔지니어를 있게 한 지난 20여년의 고통과 성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89년 '포장마차 결의'
서울대에서 제어계측학 박사학위를 받은 1989년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 인근 단골 포장마차에 들렀다.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이 돌았다.
변 박사는 장난처럼 불쑥 창업얘기를 꺼냈다.
“우리 창업하자.” 오늘날의 휴맥스를 있게 한 ‘포장마차 결의’였다.
술이 깬 다음날 변 박사와 대학원생 동료, 후배 등 7명은 창업실행에 들어갔다.
변 박사는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자본금 5000만원을 빌려 학교 인근인 서울 봉천동 낙성대 입구에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냈다.
회사이름은 사람을 세우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넣어 ‘건인시스템’으로 정했다.
휴맥스의 전신이다. 대한민국 벤처 1세대의 벤처신화는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됐다.
#수재들은 이공계로...
그가 고교생이던 1970년대 말 수재들은 이공계로 모여 들었다.
경제성장과 빈곤 탈출을 위해 산업을 키우고 기술을 고도화해야 했던 국가발전 프로젝트 실행에 민·관이 함께 나섰던 때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과학기술이 세상에 더 큰 힘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공계에 흥미를 가졌고 결국 공대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 1학년을 마친 그는 당시 신설학과였던 제어계측학과가 뿌린 팸플릿을 봤다.
“로봇공학, 미사일 유도제어, 신호처리 등 멋진 말들이 내 눈길을 사로 잡았다”고 그는 전공선택 에피소드를 전했다.
박사학위를 얻은 그는 적당히 대학교수가 돼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귀국한 권욱현 지도교수가 전해준 미국 실리콘 밸리의 ‘젊음, 창업, 꿈, 노력, 역경, 가치실현’ 이야기는 그를 교단이 아닌 창업으로 이끌었다.
#'셋톱박스에 미래 있다'
창업 초기 5년간 ‘포장마차 일당’들은 헤맸다.
대학에서 배운 것을 위주로 공장자동화 관련 용역사업, 비디오 신호처리 보드 등 할 수 있는 일만 했다.
사업전략이나 목표없이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지 못했던 것. 성공 가능성을 보는 사업적 시각도, 안목도 없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다 건인시스템은 PC용 영상처리보드라는 제품을 내놨다.
별로 신경쓰지 않은 채 “영상 위에 자막을 올릴 수 있다”는 문구를 광고에 넣었다.
고객의 반응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장의 반응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능을 전문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자막처리 보드인 비디오믹스로 제품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노래방 붐이 일면서 이 제품은 노래방 영상에 가사를 띄우는데 없어서는 안될 제품이 됐다.
대기업과의 경쟁을 뚫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시장과 사업 이해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이 젊은 벤처인들은 1993년 디지털 가전사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창업후 처음으로 사업전략상 의미있는 생각을 담아낸 것이다.
노래방에 가사를 띄우기 위해 창업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는 내부 갈등도 한몫을 했다.
이 와중에 창업자 중 한명이 나가버렸다.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기술이 들어간 가전제품과 결합하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고 이 흐름을 타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1995년 초 미래를 결정한 기회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호주의 한 방송국이 디지털 위성 셋톱박스를 사려한다는 입찰 안내서를 삼성물산쪽을 통해 입수한 것.
이 때 휴맥스는 기존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고 전력을 셋톱박스 개발에 쏟아 부었다.
셋톱박스는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등이 TV에 구현될 수 있도록 디지털 신호를 제어해주는 핵심 장치다.
TV 위나 옆에 놓이는 셋톱박스 안에는 시청자들로부터 시청료를 물리고 계산하는 과금시스템도 들어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시장이 무궁무진하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위기 뒤 '대박'
위성방송 수신기술이 전무했던 회사는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맨바닥에서 기술자료를 모았다. 수출도 해외 방송사의 방송규격에 맞아야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퇴짜를 수도 없이 맞았다.
개발에 착수한 지 1년 6개월만인 1996년 9월 첫 제품이 부산항을 떠나 호주로 향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경쟁회사들처럼 휴맥스 제품에도 기술적 하자가 발생했고 수출대상 방송국이던 유럽의 대형 방송사가 합병당해 시장도 잃었다.
경제위기가 엄습했던 1997년 부도설에 휩싸였다.
거래업체인 해태전자가 부도를 낸 탓이었다. 국가경제를 뒤흔든 외환위기 속에서 현금은 고갈됐다.
월급도 제대로 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는 위기를 해외법인 설립을 통한 수출로 돌파했다. 약속의 땅은 영국이었다.
유럽시장의 높은 관세 장벽을 뚫고 디지털 방송이라는 거대물결이 일고 있었기 때문.
관건은 유럽의 거대 기업을 어떻게 이기느냐는 데 있었다.
그는 틈새시장인 일반 유통시장을 공략했다.
방송국과 직접 협상하기보다 일반 디지털 유통시장이 기술력으로 일단 승부하기에 나았다.
변 사장은 제품 브랜드를 휴맥스로 고집했다. 이윽고 1998년 1월 회사 이름을 휴맥스로 바꿔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기술력이 알려지면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문자가 요구하는 상표, 즉 OEM 방식을 버리고 휴맥스 제품으로 물건을 팔았다.
100개, 200개 주문이 들어왔고 21세기가 되자 전세계 방송사는 물론 일반 유통시장이 물량을 요구했다.
1999년 중동, 2001년 독일과 미국, 일본에 진출했다. 2002년 이후엔 아시아 시장도 급팽창해 휴맥스 제품을 알리고 있다.
일본의 위성 셋톱박스 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는 유일한 외국브랜드가 휴맥스다.
#20년만에 6000배 성장
창업 첫해인 1989년 1억2500만원이었던 매출은 2008년 7800억원, 2009년 8000억원에 이어 2010년 1조원을 돌파했다.
20년만에 6000배가 넘는 성장을 이룬 것이다.
전세계 15개국에 해외법인과 지사를, 폴란드 인도 중국 등 7개국에 생산거점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80여개국에 셋톱박스를 수출하고 있는 휴맥스는 전체 매출 중 수출 비중이 95% 이ㅈ상에 달한다. 전체 임직원 중 절반이 연구직인 것도 특징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고통을 통한 성장.’ 도전적인 삶이 인생을 보다 더 열심히 사는 길이라는 설명이다.
그의 기업관은 인간을 우선시하는 회사명처럼 기업존속과 자아실현 두가지로 요약된다. 회사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익을 내야 하지만 그 속에서 개인 즉 임직원들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돈되는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기회가 있는 분야에서 기회를 찾는 게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길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아담 스미스가 쓴 도덕감정론이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고.
고기완 기자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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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대규 대표 프로필
▶1960년 경남 출생
▶1983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졸업
▶1989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 박사
▶1989년 건인시스템(현 휴맥스) 설립
▶1998년 휴맥스 대표이사
▶2001년 벤처리더스클럽 회장
▶2011년 포스코 사외이사
변대규 휴맥스 대표
변대규 휴맥스 대표이사 사장(52)은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기업인이다. 창업 20년만인 작년 매출 1조원을 돌파했고 그 중 95%가 수출인 점을 감안하면 ‘기적의 벤처인’ ‘국가대표 벤처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변 사장은 생글생글 독자에게 단 한가지를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고통을 통한 성장, 즉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는 것. “안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어려움에 도전하는 것이 자신의 역량을 높이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게 한다”고. 성공한 엔지니어를 있게 한 지난 20여년의 고통과 성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89년 '포장마차 결의'
서울대에서 제어계측학 박사학위를 받은 1989년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 인근 단골 포장마차에 들렀다.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이 돌았다.
변 박사는 장난처럼 불쑥 창업얘기를 꺼냈다.
“우리 창업하자.” 오늘날의 휴맥스를 있게 한 ‘포장마차 결의’였다.
술이 깬 다음날 변 박사와 대학원생 동료, 후배 등 7명은 창업실행에 들어갔다.
변 박사는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자본금 5000만원을 빌려 학교 인근인 서울 봉천동 낙성대 입구에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냈다.
회사이름은 사람을 세우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넣어 ‘건인시스템’으로 정했다.
휴맥스의 전신이다. 대한민국 벤처 1세대의 벤처신화는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됐다.
#수재들은 이공계로...
그가 고교생이던 1970년대 말 수재들은 이공계로 모여 들었다.
경제성장과 빈곤 탈출을 위해 산업을 키우고 기술을 고도화해야 했던 국가발전 프로젝트 실행에 민·관이 함께 나섰던 때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과학기술이 세상에 더 큰 힘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공계에 흥미를 가졌고 결국 공대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 1학년을 마친 그는 당시 신설학과였던 제어계측학과가 뿌린 팸플릿을 봤다.
“로봇공학, 미사일 유도제어, 신호처리 등 멋진 말들이 내 눈길을 사로 잡았다”고 그는 전공선택 에피소드를 전했다.
박사학위를 얻은 그는 적당히 대학교수가 돼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귀국한 권욱현 지도교수가 전해준 미국 실리콘 밸리의 ‘젊음, 창업, 꿈, 노력, 역경, 가치실현’ 이야기는 그를 교단이 아닌 창업으로 이끌었다.
#'셋톱박스에 미래 있다'
창업 초기 5년간 ‘포장마차 일당’들은 헤맸다.
대학에서 배운 것을 위주로 공장자동화 관련 용역사업, 비디오 신호처리 보드 등 할 수 있는 일만 했다.
사업전략이나 목표없이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지 못했던 것. 성공 가능성을 보는 사업적 시각도, 안목도 없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다 건인시스템은 PC용 영상처리보드라는 제품을 내놨다.
별로 신경쓰지 않은 채 “영상 위에 자막을 올릴 수 있다”는 문구를 광고에 넣었다.
고객의 반응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장의 반응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능을 전문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자막처리 보드인 비디오믹스로 제품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노래방 붐이 일면서 이 제품은 노래방 영상에 가사를 띄우는데 없어서는 안될 제품이 됐다.
대기업과의 경쟁을 뚫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시장과 사업 이해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이 젊은 벤처인들은 1993년 디지털 가전사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창업후 처음으로 사업전략상 의미있는 생각을 담아낸 것이다.
노래방에 가사를 띄우기 위해 창업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는 내부 갈등도 한몫을 했다.
이 와중에 창업자 중 한명이 나가버렸다.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기술이 들어간 가전제품과 결합하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고 이 흐름을 타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1995년 초 미래를 결정한 기회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호주의 한 방송국이 디지털 위성 셋톱박스를 사려한다는 입찰 안내서를 삼성물산쪽을 통해 입수한 것.
이 때 휴맥스는 기존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고 전력을 셋톱박스 개발에 쏟아 부었다.
셋톱박스는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등이 TV에 구현될 수 있도록 디지털 신호를 제어해주는 핵심 장치다.
TV 위나 옆에 놓이는 셋톱박스 안에는 시청자들로부터 시청료를 물리고 계산하는 과금시스템도 들어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시장이 무궁무진하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위기 뒤 '대박'
위성방송 수신기술이 전무했던 회사는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맨바닥에서 기술자료를 모았다. 수출도 해외 방송사의 방송규격에 맞아야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퇴짜를 수도 없이 맞았다.
개발에 착수한 지 1년 6개월만인 1996년 9월 첫 제품이 부산항을 떠나 호주로 향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경쟁회사들처럼 휴맥스 제품에도 기술적 하자가 발생했고 수출대상 방송국이던 유럽의 대형 방송사가 합병당해 시장도 잃었다.
경제위기가 엄습했던 1997년 부도설에 휩싸였다.
거래업체인 해태전자가 부도를 낸 탓이었다. 국가경제를 뒤흔든 외환위기 속에서 현금은 고갈됐다.
월급도 제대로 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는 위기를 해외법인 설립을 통한 수출로 돌파했다. 약속의 땅은 영국이었다.
유럽시장의 높은 관세 장벽을 뚫고 디지털 방송이라는 거대물결이 일고 있었기 때문.
관건은 유럽의 거대 기업을 어떻게 이기느냐는 데 있었다.
그는 틈새시장인 일반 유통시장을 공략했다.
방송국과 직접 협상하기보다 일반 디지털 유통시장이 기술력으로 일단 승부하기에 나았다.
변 사장은 제품 브랜드를 휴맥스로 고집했다. 이윽고 1998년 1월 회사 이름을 휴맥스로 바꿔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기술력이 알려지면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문자가 요구하는 상표, 즉 OEM 방식을 버리고 휴맥스 제품으로 물건을 팔았다.
100개, 200개 주문이 들어왔고 21세기가 되자 전세계 방송사는 물론 일반 유통시장이 물량을 요구했다.
1999년 중동, 2001년 독일과 미국, 일본에 진출했다. 2002년 이후엔 아시아 시장도 급팽창해 휴맥스 제품을 알리고 있다.
일본의 위성 셋톱박스 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는 유일한 외국브랜드가 휴맥스다.
#20년만에 6000배 성장
창업 첫해인 1989년 1억2500만원이었던 매출은 2008년 7800억원, 2009년 8000억원에 이어 2010년 1조원을 돌파했다.
20년만에 6000배가 넘는 성장을 이룬 것이다.
전세계 15개국에 해외법인과 지사를, 폴란드 인도 중국 등 7개국에 생산거점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80여개국에 셋톱박스를 수출하고 있는 휴맥스는 전체 매출 중 수출 비중이 95% 이ㅈ상에 달한다. 전체 임직원 중 절반이 연구직인 것도 특징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고통을 통한 성장.’ 도전적인 삶이 인생을 보다 더 열심히 사는 길이라는 설명이다.
그의 기업관은 인간을 우선시하는 회사명처럼 기업존속과 자아실현 두가지로 요약된다. 회사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익을 내야 하지만 그 속에서 개인 즉 임직원들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돈되는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기회가 있는 분야에서 기회를 찾는 게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길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아담 스미스가 쓴 도덕감정론이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고.
고기완 기자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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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대규 대표 프로필
▶1960년 경남 출생
▶1983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졸업
▶1989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 박사
▶1989년 건인시스템(현 휴맥스) 설립
▶1998년 휴맥스 대표이사
▶2001년 벤처리더스클럽 회장
▶2011년 포스코 사외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