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벤츠… 헨리 포드… 정주영…

그들이 있어 세상이 빨라졌다
[자동차는 내 친구] (3) 자동차산업의 주역들
‘정주영,칼 벤츠,헨리 포드,엔초 페라리…’

이들은 110여년의 자동차 산업을 일군 주역들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기아자동차와 세계 최고의 명차라는 수식어가 붙은 메르세데스벤츠,미국 최대 자동차회사인 포드와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페라리 등이 이들의 손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도전의식으로 세계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 자동차산업 초석 정주영 회장

“국토의 도로가 동맥이라면 자동차는 피와 같다.

자동차 산업은 국가에 가장 필요한 산업이며 나는 자동차 산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내 후대들에게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 명예회장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것은 1940년대 초로 당시 25세의 청년 정주영은 ‘아도서비스’라는 합작회사를 만들어 자동차정비업체를 시작,처음으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자동차 산업이 미래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판단하고 국산자동차 개발에 관심을 돌렸다.

이에 1966년에는 합작회사형태로 자동차를 생산하던 포드와 결별하고 순수 한국인의 손으로 국산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기술자립 의지는 1976년 1월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인 ‘포니’를 만들어 냈다.

정 명예회장의 국산 고유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현재 자동차 공업수준은 외국자동차의 조립생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자동차 역사 쓴 역칼 벤츠

칼 벤츠와 고틀립 다임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발명했다.

자동차 역사라는 새 장을 연 장본인인 셈이다.1883년 10월 칼 벤츠는 만하임에서 세계 최초의 자동차 공장 ‘벤츠&시에’를 설립하고 10년 뒤인 1893년 앞바퀴를 여러 각도로 돌릴 수 있는 ‘빅토리아’를 개발했다.

비슷한 시기 고틀립 다임러도 1886년 ‘말없는 마차’라는 이름의 모터 장착 틀을 개발했고 1890년 ‘DMG’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칼 벤츠와 고틀립 다임러의 자동차 제작 경쟁 덕분에 독일의 차들은 이 때 이미 근대적인 의미의 모양새를 갖췄다.

다임러사의 ‘메르세데스’ 브랜드는 당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1902년부터 모든 차에 메르세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벤츠&시에와 DMG는 1926년 합병하고 ‘다임러-벤츠 AG’를 설립했다.

경영은 칼 벤츠가 맡았고 이후 다임러 벤츠의 모든 상품에는 메르세데스-벤츠라는 이름이 붙었다.

# 자동차 대중화 선도 헨리 포드

헨리 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간주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891년 16살 때 엔지니어로 에디슨 전기회사에 입사했으며 뛰어난 기술과 강한 탐구심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선임 엔지니어로 임명된 후,자택 뒤편 작업장에서 내연엔진의 연구에 몰두했고 32세에 타이어를 사용한 4륜 구동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1903년 40세의 나이로 포드 자동차를 설립하고 부사장 겸 선임엔지니어 직책을 맡게 됐다.헨리 포드의 가장 큰 업적은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룬 것이다.

그는 1908년 모델 ‘T’를 당시 차 가격의 절반 수준인 850달러에 내놓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구매하게 했다.

1913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새로운 조립공정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를 통해 자동차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기도 했다.

포드를 얘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리 아이아코카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머슬카인 ‘머스탱’이라는 차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개발했다.

# 스포츠카의 신화 엔초 페라리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는 자동차 레이서로 유명했던 엔초 페라리가 1947년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설립했다.

창업주의 장인정신과 이탈리아 유명 디자인업체인 피닌파리나가 만들어낸 스타일이 더해져 전세계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엔초 페라리는 1898년 2월 18일에 모데나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알파 로메오의 레이서로 활동하다 1929년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팀을 창설했다.

1940년엔 ‘티포 815’를 완성했다.

그는 1988년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설립한 페라리는 창립 이래로 전세계 자동차 경주에서 5000회 이상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유하며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자동차의 거두 토요다

1867년 일본 시즈오카현 야마구치라는 시골마을의 가난한 목수집안에서 토요다 사키치가 태어났다.

장남으로서 가업인 목수가 되어야 했지만 사키치는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사키치는 어머니가 쓰던 베틀을 개선해 1894년 한 손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 ‘토요다식목제인력직기’를 만들었다.

1924년엔 일생일대의 대작인 ‘G형 자동직기’의 개발에 성공하고 1926년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를 설립했다.

그의 장남 장남 토요다 키이치로는 1934년 최초로 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1935년 5월 그의 첫 승용차인 ‘모델A1’이 완성됐고 키이치로는 1937년 아이치현 코모로에 도요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최진석 한국경제신문 기자 isk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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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회장의 '자동차 사랑'

[자동차는 내 친구] (3) 자동차산업의 주역들
정주영 명예회장이 국산 고유모델 개발을 통한 국내 자동차산업의 탄탄한 기초를 다졌다면 정몽구 회장은 한국 자동차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시중에 팔리고 있는 차에 대한 문제점을 직접 점검하고 품질 개선방안을 일일이 지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좋은 품질의 차를 생산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생산라인의 중단이 흔해졌고,신차출시 일정도 품질검증 때문에 미뤄지기도 했다.

1999년 3월 정몽구 회장은 연구개발을 맡고 있던 한 고위임원에게 미니밴인 카니발을 한남동 자택으로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 달 후인 4월 초 기아차 품질회의가 열렸다.

회의장 가운데에는 정 회장의 지시에 따라 카니발 한대가 놓여 있었다.

정 회장은 분필을 가지고 슬라이딩 도어 위쪽 창문부터 시트 밑,바닥,천정,문틈 등에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이것들을 당장 고쳐.” 카니발을 집 마당에 갖다 놓고 밤낮으로 들여다보고 주말이면 직접 몰아본 뒤 느낀 문제점을 회의에서 하나하나 지적한 것이다.

2003년 8월에는 기아차 오피러스 수출을 앞두고 마지막 품질점검 회의가 양재동 본사에서 열렸다.

정 회장은 당시 남양연구소를 방문해 수출용 오피러스를 직접 몰고 주행시험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정몽구 회장은 이때 ‘모기소리’ 정도의 미세한 소음을 확인하고 기술진에게 원인 규명 및 개선을 지시했다.

품질본부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소음 엔진으로 바꿔야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40여일이 소요된다고 보고했다.

정몽구 회장은 수출을 늦추더라고 바꾸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정몽구 회장의 ‘품질경영’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것은 2004년이다.

현대차는 2004년 미국 제이디파워(J.D.Power) 신차품질조사(IQS)에서 사상 처음으로 도요타를 제치고 일반브랜드 부문 4위에 올랐다.

이같은 비약적인 성장 덕에 정 회장은 2009년 세계적인 자동차전문매체인 모터트렌드의 세계 자동차산업 영향력 있는 인물 3위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