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왕 아래 얼어죽은 60만명

1709년 겨울 평년보다 20도 낮아

기근·질병에도 왕은 전쟁에 몰두

[경제사 뒤집어 읽기] (19) 프랑스의 가장 추웠던 겨울
겨울 추위가 가장 심했던 때는 언제일까.

우리는 과거의 기후를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지구는 더워지는 걸까,추워지는 걸까. 최근 기후사(氣候史) 분야에서 괄목할 발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 역사학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상당히 유용한 힌트를 제공한다.

프랑스에서는 겨울 추위가 극심했던 해로 1879년과 1956년을 들곤 했지만,최근 연구자들은 아마도 1709년 겨울이 그보다 더 심해서 이때가 지난 500년 중 가장 추웠던 시기였으리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루이 14세 시대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생시몽은 이 당시의 날씨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겨울 날씨는 혹독했다. 추위가 어찌나 심한지 베르사유궁 방 안 찬장에 보관해 두었던 헝가리 화장수(로즈마리 성분이 첨가된 알코올 방향액),엘릭시르 시럽,도수가 가장 높은 리쾨르주의 병들이 모두 터졌다. 빌르루아 공작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는 유리잔에 얼음이 떨어졌다. "

베르사유 궁전의 난방 시설이 형편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울의 방'을 데우는 설비라고는 그 거대한 살롱 양쪽 벽에 붙어있는 벽난로 두 개가 전부라 아주 추운 겨울이면 왕이 식사하는 식탁 위의 포도주가 얼어붙는 일도 있었다.

1709년에 유독 기온이 내려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두 해 전인 1707년 지구상에 4개의 거대한 화산이 거의 동시에 폭발한 것이 원인일지 모른다.

이탈리아의 베수비오산,그리스의 산토리니섬,일본의 후지산,인도양 서쪽의 레위니옹섬의 화산이 폭발해 몇 해 동안 화산 분출물들이 대기 중에 퍼졌다.

이것이 햇빛을 가려 대기 온도를 내렸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그 때문인지 1708년 여름 온도부터 예년보다 낮더니,겨울에 맹추위로 이어진 것이다.

마르셀 라쉬베르라는 학자는 1708년 12월 중순부터 1709년 3월 중순까지 모두 7번의 한파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1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계속된 네 번째 추위가 가장 심해 기온이 영하 10도에서 시작해 영하 20도(1월20일)까지 내려갔다.

파리에서는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날이 19일 연속돼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파리나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한겨울에도 영하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당시 추위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상학자는 발트해의 보트니아만에 자리잡은 시베리아 유형의 고기압이 남쪽으로 북극권의 찬 공기를 내려보내 유럽 대륙 거의 전체를 냉각시켰다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유럽 전체가 똑같은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영국,네덜란드,프랑스 북부 지방보다는 지중해 연안지역이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터키까지 피해가 미치지는 않았다.

북유럽에서도 덴마크와 스웨덴이 극심한 추위에 떨었고,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순드(Sund) 해협이 얼어붙었지만 남서쪽에서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는 맹추위를 피해갔다.

추위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다. 프로방스와 랑그독 등 남프랑스 올리브나무들은 거의 다 얼어 죽었고,그 후 올리브 재배 면적은 1709년 이전 수준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겨울 작물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어 봄과 여름에 심각한 기근사태를 가져왔다.

추위와 식량 부족은 다시 질병과 높은 사망률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추위는 우선 기관지,폐,심혈관 관련 질병을 악화시켰다. 많은 노인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더 심각한 상황은 4월에 시작됐다. 식량 부족은 곧 영양불량 상태를 초래해 많은 병사자가 나왔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부패한 고기나 오염된 음식을 먹다가 소화불량에 걸리고 이질,티푸스,열병에 시달렸다.

먹을 것을 요구하는 폭동도 빈발했다.

이 현상을 연구한 역사가의 분석에 의하면 1709년 2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155번의 식량 폭동이 일어났고,그해 여름에 다시 38번 더 발생했다.

다행히 그 다음 해 농사가 어느 정도 안정돼 더 극단적인 희생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1709년 한 해의 희생자만 해도 엄청났다.

이 해에 굶어죽은 사람은 60만명으로 추산된다.

저명한 역사가 르루아라뒤리는 여기에 더해 출산 감소 20만명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근의 시기에 출산이 줄어드는 것은 잘 알려진 현상이다.

그런 것은 차치하고 실제 사망자만 놓고 보더라도 18세기의 60만명은 인구 비율을 고려하면 오늘날에는 그 세 배인 180만명에 해당한다.

이는 1차대전의 희생자와 맞먹는 수치다. 극심한 겨울 추위는 세계대전만큼의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저온을 비롯한 자연재해는 인간에게 큰 피해를 주지만,실제로 얼마나 큰 피해를 당하느냐는 해당 사회가 어떤 식으로 거기에 대비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해마다 태풍과 홍수가 발생하지만 방글라데시가 입는 피해와 일본이 입는 피해는 다르다.

선진국이란 이런 자연재해에 대비한 인프라가 탄탄하게 갖춰진 국가라는 한 역사가의 말은 실로 타당하다.

1709년 루이 14세는 유럽의 패권을 노리고 많은 국가들과 무모한 전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할 여력도 의지도 없다.

흔히 말하는 대로 천재(天災)는 동시에 인재(人災)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