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대한민국 역사 상식에 도전한다

"민족보다는 '자유본성을 지닌 개인’을 주체로한 역사를 보자"
기획- 이영훈 교수와 역사 대담
▲김형주=교수님은 '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라는 책에서 조선시대에는 민족이란 말과 민족의식이 없었다고 하셨는데요.

"민족이란 말은 20세기 초 일본에서 수입된 것입니다. 이후 최남선 선생이 3 · 1독립선언서에서 그 말을 쓰면서 비로소 대중화했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까지 지배적인 사관은 성리학적 정통론이었습니다.

18세기 '동사강목'이라는 역사책은 역대 왕조를 '이 왕조는 정통,저 왕조는 비정통'이라는 식으로 구분했습니다.

얼마나 공자의 도를 충실히 계승하고 중국에 대해 사대를 잘 했느냐를 기준으로 역사의 정통을 파악하는 사관입니다. 성리학적 정통론의 역사학에서 단군은 높이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자(箕子)가 우리 문명의 시조로 받들어졌습니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우리 문명이 중국 성인인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자조선의 정통이 마한으로,신라로,고려로,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역사학입니다. 거기에는 오늘날의 민족이란 말과 개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받으면서 기자가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식민지 초기에만 해도 기자냐 단군이냐 하는 혼란이 있었지만,점차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쓰이고 4대 국경일의 하나로 단군을 받드는 개천절이 제정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으로서 배달민족의 혈통에 바탕을 둔 역사공동체가 성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를 가지고 한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학이 지금까지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

▲김승재=민족주의는 일제 강점기 한국인에게 역사적 정체성을 부여하며 우리 민족이 살아남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나도 민족주의가 시대에 맞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는 일제 지배 아래에서 한국인에게 역사적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힘을 합해 독립운동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생겨난 이후에는 아직 자유 이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민족주의가 국민통합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의 특정 시대에 발견되고 구성된 것인 만큼 시대가 바뀌자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념과 공동체의식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

▲황인혜=민족주의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인가요.

"통합역할을 해오던 민족주의는 1980,1990년대 통일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민족주의가 절정에 달하면서 대한민국의 성립이 민족분단을 초래했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았다는 역사인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길은 통일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지요.

이런 통일운동 흐름이 발전해 2000년 남북정상 공동선언이 나왔습니다.

선언의 제1조를 보면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한다'고 돼있습니다.

2조에서는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은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언에서는 그 점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통일국가가 자유민주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분명치 않았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분열하고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와 사회를 가르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대립,좌와 우의 갈등도 그때부터 본격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주의가 통합이 아니라 분열의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김초롱=그러나 통일을 하자면 민족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나요.

"통일의 당위성이 민족주의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같은 혈통과 언어 문화와 역사를 지녔다는 공동체의식이 없으면 통일을 왜 합니까.

민족주의는 감성적 문화적 차원의 공동체의식으로서, 통일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 말도 민족주의를 버리자는 주장이 결코 아닙니다.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통일이라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이념적 행위입니다.

오늘날의 유럽연합에서 보듯 민족이 달라도 이념이 같으면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통일은 불가능합니다. 통일은커녕 내전이 벌어질 뿐이지요.

실제 2000년의 공동선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면 남북 간 문화적 교류는 활발했지만 정치협상은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점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통일문제에서는 민족주의 감성을 자유민주주의의 이성으로 적절히 통제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

▲이승수=그렇다면 역사는 민족이 아니라 누구를 주인공으로 해서 쓰여져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민족보다 개별 인간의 삶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한 미국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인간 이해가 현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선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명 자유 행복권을 추구하는 정치이념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생겨나고 또는 받아들여졌으며, 그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 경제 사회의 제도와 기구가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한국 근 · 현대사를 공부하는 기본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형주=개별 인간을 주체로 역사를 서술한다면 국민통합이라는 역사교육의 목적을 이루기 힘들지 않을까요.

"개별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쓴다고 해서 많은 사람의 인생사를 나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점이 자주 오해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본성은 생명 자유 행복권이란 관점에서,그러한 인간 본성을 지지하고 보장하는 법과 제도 기구가 쟁취되고 발전해온 역사를 쓰자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을 자유주의적 문명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민족 분단을 초래하면서 잘못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올바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헌법적 가치에 기초한 애국주의야말로 국민통합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은 자유 이념에 바탕을 둔 정치적 통합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 점에서 국민과 민족을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정리=이유미 바이트 기자 worldeyu@naver.com

☞다음호(4월18일자)에 계속됩니다

※대담 동영상은 자유기업원 프리넷뉴스(http;//www.fntv.kr/)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