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좀머 씨 이야기'와 라인강의 기적(下)
[좀머 씨 이야기]에서 소년은 좀머 씨와 인생에서 의미 깊은 네 번의 만남을 가진다.

그 중 첫번째 만남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린 어느 여름 날 오후 소년이 경마 애호가인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경마장에 다녀오는 길에 이루어진다.

소년의 아버지는 사나운 폭우에도 아랑곳없이 여느 때처럼 배낭을 메고 길을 걷는 좀머 씨를 발견하고 차에 탈 것을 권하지만 그는 앞을 향해 계속 발을 내딛을 뿐이었다.

재차 차에 탈 것을 권하는 아버지를 향해 좀머 씨는 소년이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명히 들은 그의 육성을 남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Ja so lasst mich doch endlich in Frieden)!"

소설에서 이 부분은 평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좀머 씨의 고뇌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필자는 지엽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소년과 아버지가 '자동차'를 타고 경마장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은 잿더미 그 자체였고,먹을 것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다. 일반 가정에서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빠른 경제 부흥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폴크스바겐(Volkswagen)의 비틀(Beetle)이란 차종으로 대표되는 자동차산업은 서독 경제성장의 주역 중 하나이며, 전후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우리는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라인강의 기적은 사실 한국식 표현으로,한강의 기적을 독일에 적용시킨 용어이다.

독일 현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발전을 보통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1950년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The Times)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유럽 경제의 중심국가로 부상한 독일의 빠른 경제성장이 다른 국가들에는 기적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면 우선 마셜 플랜(Marshall Plan)부터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셜 플랜이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서유럽 국가들의 재건을 목표로 추진한 지원계획을 말한다.

마셜 플랜의 공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 Recovery Program)이나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이 1947년 6월 하버드대 졸업식 축하연설에서 유럽 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에 흔히 마셜 플랜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독일을 영구 농경국가로 만들자는 모겐소 플랜은 재무부의 입장이었다).

독일의 경우 마셜 플랜은 미 · 영 · 프 3국이 점령한 서독 지역 경제회복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이에는 소련이 서독에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담겨져 있었다.

마셜 플랜의 성과에 대한 해석은 그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과거에는 마셜 플랜이 서독 경제부흥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기술한 책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마셜 플랜을 서독 경제부흥의 주원동력으로 보기 힘들다는 경제사학자들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셜 플랜이 서독 경제성장에 기여한 부분은 있으나 사람들의 믿음처럼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경제사학자들이 이에 대한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원조 시점에 관한 문제다. 서독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1948년께부터 시작되었는데,이때는 이미 인프라가 상당 수준 회복되어 경제부흥의 발판이 마련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셜 플랜에 의한 원조 프로그램은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필요한 자금을 제때 공급했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는 원조 규모에 관한 것이다. 서독이 소련이 점령한 동독과 마주하고 있으며 패전국이기 때문에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독이 받은 원조금은 영국과 프랑스가 받은 원조금보다도 훨씬 적었다.

더 많은 원조를 받은 국가들의 성장률이 서독보다 오히려 낮았기 때문에 마셜 플랜만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 서독 경제부흥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들을 뽑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네 가지이다.

첫째로는 경제체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전후에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라는 독특한 체제를 도입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유방임과 사회주의의 중간 위치에 있는 체제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쉬운데,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이들은 독일 서남부 프라이부르크 대의 학자들이다.

프라이부르크 학파는 시장기능을 되살려야 하지만 시장이 곧 자연적 질서는 아니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과 감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과거의 자유주의와 구분하여 신자유주의(Neoliberalismus)라 일컬어지는데,정부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현대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기는 했지만 전쟁 기간 중 철저히 경제를 통제했던 독일의 상황을 감안하면 커다란 진보라고 할 수 있다.

1949년 건립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경제장관 에르하르트(Ludwig Erhard)에 의해 적극 도입된 사회적 시장경제는 시장의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서독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에르하르트는 연합군 점령 시절에는 경제자문관 자리에 있었으며,1963년에는 독일 총리가 되었다).

경제기적의 두 번째 요인은 제국 마르크(Reichmark)를 도이치 마르크(Deutsche Mark)로 대체한 1948년의 화폐개혁이다.

화폐개혁은 시중의 통화량을 줄여 지난 시간 언급한 억압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였고,이와 비슷한 시기에 가격통제와 배급제도가 폐지 되었다.

시장이 되살아나고 시장에서 제값을 받고 상품을 팔 수 있게 되자 독일 국민들은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제학자들은 연합군 점령시절에 이루어진 화폐개혁을 독일 경제기적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근로의욕이 높아져 생산성이 향상된다 해도 수요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독일 경제발전에 날개를 달아준 결정적 사건은 바로 우리 민족에게는 비극인 한국전쟁(6 · 25전쟁:1950~1953년)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서방세계는 독일에 대한 경제제재를 거의 다 해제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 독일의 수출은 두 배 이상 늘었고,실업률은 큰 폭으로 감소했다.

경제체제의 변화와 화폐개혁,그리고 한국전쟁이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일 것이다.

전쟁의 참화도 독일인들이 축적한 지식과 기술까지 전부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풍부하고 싼 고급 기술인력이 없었다면 독일의 경제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도 소년과 소년의 형들은 과학과 기계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아버지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지식이야말로 당시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재산이자 보물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좀머 씨 이야기]로 돌아오면 소년은 비오는 날의 만남 이후에도 좀머 씨와 절대 잊을 수 없는 세 번의 만남을 더 가지게 된다.

카롤리나 퀴켈만이란 같은 반 여자아이와의 데이트 약속이 깨져 실의에 빠졌을 때,노처녀 풍켈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다 심하게 혼나 어린 마음에 자살을 시도하려 할 때,그리고 마지막은 열다섯의 나이가 되어 호숫가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있을 때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좀머 씨는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소년은 이 모습을 목격하고도 사람들에게 침묵을 지키게 되고,좀머 씨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간다.

소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1960년대 중반으로 추정됨)의 사람들은 자가용이나 세탁기,잔디밭의 스프링클러에 대해 걱정했어도 좀머 씨 같은 늙은 별종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물질적 풍요로 인해 무언가는 잊혀진 것이다.

좀머(Sommer)는 독일어로 여름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좀머 씨는 독일의 아픈 역사에서 여름날의 추억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