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사주받아" 음모론 주장 ···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왜곡된 민족주의
[Global Issue] 엉뚱한 反韓시위로 불똥 튄 대만 태권도 선수 실격사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여자 태권도 선수가 실격패한 사건이 엉뚱하게도 반한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잉주 대만 총통까지 나서 자제를 촉구했지만 반한 감정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사태의 원인을 두고 앞서가던 대만이 2000년대 들어 한국에 경제 문화 분야에서 급격히 뒤처지고,중국의 부상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생긴 열등감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 고조되는 반한시위

발단은 지난 17일 열린 태권도 49㎏급 경기에서 대만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양수쥔이 베트남의 부티하우를 9-0으로 앞서다 실격패하면서 발생했다.

심판진은 양수쥔의 발뒤꿈치에 공인되지 않은 센서 패치 2개를 발견해 실격을 선언했다고 설명했다.

대만에서는 실격 선언 배후에 한국인 태권도 임원들이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며 반한 감정이 급속히 확산됐다.

대만 일간지 중앙서에 따르면 대만인들은 지난 18일 한국계 심판을 지목하며 대만 행정원 체육위원회(체육부) 앞에서 태극기를 태우고 한국산 라면을 짓밟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국 상품 불매운동도 일고 있다.

한 누리꾼이 페이스북에 "한국의 모든 것을 보이콧하자"는 페이지를 개설하자 이틀 새 34만명이 앞다퉈 서명했다.

21일에는 성난 군중이 타이베이시 완화구에 위치한 한국 학교 정문과 운동장에 계란을 던지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몇몇 대만 상점에서는 손님들의 국적을 확인해서 한국인일 경우 쫓아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대만 언론과 정치인들이 자국 정치 상황과 맞물려 의도적으로 여론을 악용해 부추긴 측면이 짙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BBC 인터넷 중문판은 "대만 정치인들이 27일 대만 5대 도시 시장 · 의원선거를 앞두고 유세장에서 양수쥔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국민당 후보들은 태권도복을 입고 유세장에 나와 양수쥔에 대한 지지를 과시했다.

TV와 신문 등 대만 언론들도 자극적인 시위 모습을 사건발생 이후 집중 보도하고 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잉주 총통은 "양 선수가 실격한 억울한 사건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지만 비이성적 행동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전 국민에게 호소한다"며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 "한국,중국의 사주받아" 근거없는 음모론

대만인들이 개최국 중국이 아닌 한국을 향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번 판정에 한국계 심판위원이 개입됐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양수쥔의 장비를 지적한 것은 중국인 부심이었고 최종적으로 실격 판정을 내린 주심은 필리핀인으로 한국과는 무관한 결과였다.

양수쥔이 금메달에 도전했던 49㎏급에는 한국 선수가 출전하지 않아 굳이 한국이 양수쥔을 견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대한태권도협회의 설명이다. 양수쥔이 떨어져도 한국이 얻는 게 없기 때문에 한국계 심판 개입설은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만인들은 그러나 "한국이 중국의 사주를 받고 중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주기 위해 실격패를 주도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제기하며 반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양 선수의 탈락으로 중국 선수 우진쥐가 어부지리 금메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이와 관련, "양 선수의 실격패는 규정에 따른 것으로 어떤 다른 의도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런하이 베이징체육대 교수는 "주최국이 특정선수를 의도적으로 실격처리할 수는 없으며 세계태권도연맹(WTF)의 결정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서 "(문제가 있다면) WTF의 결정에 대해 국제중재위원회의 판단을 받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22일 밤 귀국한 양수쥔마저 "내가 실격당한 것은 한국 때문이 아니다"며 "정치는 정치이고 체육은 체육"이라며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자제를 당부했다.

⊙ 피해의식에 의한 왜곡된 민족주의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대만 인터넷에는 온갖 욕설과 함께 한국,한국인,태극기 등을 모독하는 각종 이미지 자료가 넘쳐나고 있다.

한국인을 개,돼지로 표현하거나 태극기의 태극 문양을 대변으로 그려 넣는 등 대부분이 저급한 것들이다.

대만의 반한 감정이 이처럼 유별난 원인은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국교를 단절한 것에 자존심을 상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때 우방국이었던 한국과 대만은 1992년 한 · 중 수교 이후 관계가 급격히 멀어졌다.

그러나 당시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많은 국가가 대만과 단교해 이것만으로 반한 감정의 원인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대만이 한때 아시아의 경쟁자로 여겼던 한국에 경제,문화적으로 갈수록 뒤처지고 국제적 입지마저 좁아지면서 생긴 열등감을 유치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앞서 지난달 23일 대만에서 열린 대륙간컵 야구대회의 한국-대만전에서는 일부 관중들이 '천안함 폭파하듯 한국을 때려부숴라'는 팻말을 들고 응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중국의 영향력에 밀려 제대로 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국민들의 피해의식을 키웠기도 했다.

태권도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건국 이래 대만에 첫 금메달을 안기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부상했다.

하지만 태권도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국제대회에서 대만이 불이익을 받는다는 불만도 함께 높아졌다.

실제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선수가 금메달을 따더라도 국기 대신 대만 올림픽위원회기가 올라가고 국가도 울리지 않는다.

제1야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주석은 "국민당 정부는 특히 주권 문제에는 늘 중국에 경도돼 있고 우리 태도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며 "그 결과 (우리 선수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일선의 관리들은 충분히 이 문제에 항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대만 관영 중앙통신은 1990년대 이래 대만이 국제 태권도 무대에서 불이익을 당한 4가지를 열거하면서 "대만은 언제나 손해를 봤다"며 "광저우가 최초가 아니고 절대로 최후가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유정 한국경제신문기자@hankyung.com